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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하나 꽃도 피더라

by 안소연

<느릿하나 꽃도 피더라>

김영숙 할머니&작가 안소연






보내고 싶었던 편지

(부제;우리 할머니)



아무리 낮은 사람이어도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할머니는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지 않아도 계속 인사를 하고 계셨다.
낮고 어두운 곳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할머니는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날도 하지 말라는 일을 살기 위해 하던 할머니는 단 한 번의 실수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픈 몸으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가족들 걱정만 하신다.
중환자실에 올라가 이틀째 되던 날 나에게 얘기하신다.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빨갛게 충혈된 눈이 낯선 곳에서 꺼지지 않는 불빛이 무서워 잠을 못 이루셨나 보다.
그다음 날은 다시 가족들을 걱정하신다.
자신의 몸은 계속 마르고 작아지고 있는데 커다란 마음을 자꾸만 꺼내주신다.
여러 날이 지나고 한번은 지금은 무슨 나물을 팔아야 하고 더덕을 까야 하고 시장에서 하던 일 얘기만 하신다.
그리고 또 지나니 손이 바삐 움직이신다. 나물을 다듬는지 더덕을 까시는지 쉬지 않으신다. 나는 조용히 이야기한다.
할머니 조금만 쉬었다 하시라고. 내가 도와줄 테니. 손을 잡아 쓰다듬으며 침대에 내려놓는다.
가시는 날까지 일을 해야 하는 할머니를 나는 안아주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쉬지 못했을 그 손을 나는 놓지 못하겠다.
내 꿈에는 아직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지만, 가족들 꿈에서는 허리도 젊은 날처럼 펴지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이셨다는 할머니.
이제는 일은 접어두시고 할아버지 손잡고 여행 다니시라고 추운 날 탱탱 붓던 얼굴 말고 시집오던 날처럼 고운 얼굴로 따스한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마지막이 너무 짧아서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고 싶다.



남기고 싶었던 편지



남기고 싶었던 편지를 이렇게 전해본다.
남은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알았다면 다 같이 모여 앉아 따뜻한 밥이라도 먹었을 텐데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는구나.
넉넉하지 않았던 삶에 항상 배불리 먹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단다.
나는 늙어 차가운지도 배고픈지도 모르고 살았다지만 너희에게는 연탄 한 장이라도 더 넣어주고 따뜻한 밥을 꼭 먹이고 싶었단다.
평생 글이라는 건 모르고 살았다지만 그건 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단다.
길쭉하고 동그랗고, 알 수 없는 것 보다 나는 그저 너희 입에 넣어 줄 길쭉한 떡 하나라도, 동그란 전 한 장이라도,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고 싶었단다.
작은 것들이어도 명절마다 신기고 싶었던 새 양말, 연말마다 건네주던 꾸깃꾸깃해도 남의 돈 우습게 보지 않고 열심히 벌어 둔 돈, 올 때마다 사주고 싶었던 따뜻한 어묵, 먹지 않고 숨겨둔 베지밀까지도 다 아쉽고 다시는 건넬 수 없어서 시린 눈물이 난다.
부디 살아오며 부족했음은 잊고 따뜻한 기억만 안고 살아가 주기를 바란다.
나는 마지막까지 따뜻한 보살핌 받으며 눈감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배곯지 말고 꼭 따뜻한 밥으로 끼니 챙기고, 찬 바람 들어올 틈 없게 따뜻하게 입고 다니거라. 내 바람은 그거면 되었다.
서로 아끼며 살아가다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내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더 주고 싶을 만큼 사랑했단다.
너희는 나의 전부였고, 함께 한 모든 순간이 행복 자체였다.
이런 말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남겨진 것에 쓸쓸할 누군가에게



남겨진다는 것은 공감할 수조차 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조금 전까지도 분명 함께했는데 나에게 생길 수 없는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슬픔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옛 기억 어딘가로 또는 품어온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을 것을 우린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함께 보내주고 나면 나는 또 주어지는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남겨놓은 편지들을 찾으며 나는 하루를 살아내었고 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때마다 주었던 작은 선물들, 함께 한 추억들이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남겨진다는 것은 참 쓸쓸하지만, 또 멀어진 당신에게 한 걸음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며, 언젠가 만날 우리를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보냅니다.
나는 남겨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남겨준 것에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남겨준 것들 안에서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잘 지내고 있으니 당신도 평안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겨진 것에 쓸쓸할 누군가에게도 이 글이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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