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찰텐, 아르헨티나
Ruta 40이라는 길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체 게바라가 20대 때 친구와 모터 사이클을 타고 달렸던 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며 가장 사랑했던 건 수많은 길들과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아르헨티나의 길들은 특유의 정취를 담고 있었다.
둘러싼 풍경은 비현실적이게 생경하고 아름다운 반면, 발 딛고 서 있는 땅은 거칠고 쓸쓸했다. 그 대비되는 조화가 참 좋았다. 쓸쓸한데 아름다운 그 느낌.
그리고 지평선.
버스가 또 길 위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엔진이 타거나… 아니면 타이어가 터졌거나. 또 그런 일이 일어난 건가?
아르헨티나 버스들은 기본 15시간 이상씩 달린다. 이제는 갑자기 버스가 길 위에 멈춰서도 놀라지 않는다. '또 내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구나.' 주섬 주섬 내릴 채비를 하는데 - 잠시 내려서 쉬었다 가자고 버스기사가 이야기한다. 아무 이유 없이.
- Por que? (왜요?)
- Por que no? (왜 그러면 안 되는데?)
배 나온 버스 기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맞네.
그냥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 길 위에 내릴 수도 있었지. 목적지에 도착하거나 꼭 내려야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힘들고 지쳤을 때는 길 위에 잠시 내려 쉴 수 있다는 걸, 쉬어도 된다는 걸 왜 나는 몰랐을까.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은 기지개를 켜고, 풍경 사진을 찍고, 담배를 폈다.
길 위에 서니 기분이 묘했다. 체 게바라가 달렸던 길, Ruta 40. 저 멀리 20대의 체 게바라가 모터 사이클을 타고 친구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흙먼지를 날리며.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그렇게.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꿀렁대는 느낌이 들었다.
체 게바라에 열광하는 유럽 사람들과 달리 남미 사람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적어도 내가 만난 대부분의 남미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보였다.)
- 너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가 남미에 오는 다른 배낭여행객들과 비슷한 거 아니야? 책과 영화 안에 존재하는 그 모습을 보고.
- 뭐라고?
- 난 '혁명' 같은 건 단어로 들었을 때나 아름다운 거라 생각해. 그게 어떤 부차적인 것들을 달고 들어오는지 너는 모를 거야.
- 그럼 넌 사람들이 계속 부조리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
-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여행객들처럼 '가슴 속 꺼지지 않는 불씨'를 가지고 이곳에 도착해 잠시 머물다 가는 게 아니라, 커다란 불구덩이 안에서 삶을 살아야 했어. 납치, 협박, 감금 등을 당하는 건 부지기수고- 집 근처 쇼핑몰이 폭파된 적도 있어. 누군가에겐 젊은 날 모험담이 다른 누군가에겐 끊고 달아나고 싶은 현실일 수 있다고.
- 그게 체 게바라랑 무슨 상관인데?
- 우리는 모두 게릴라로부터 친구나 가족을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게릴라군들의 뿌리가 체 게바라인 건 알고 있지? 그들은 나쁜 짓을 하고도 체 게바라가 외쳤던 이상과 이념을 이야기했어.
'부자들은 사라져야 해. 너희가 돈 밖에 모르는 돼지들이라 당한 거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정도는 희생해야지.'
하지만 그들이 대부분 빼앗고 죽인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야.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아버지였고, 수업 시간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였어. … 우린 휴가를 떠날 때도 아름다운 곳을 찾지 않아. 안전한 곳인지부터 먼저 확인해. 넌 이런 삶에 대해 알지 못해. 당연해. 내가 너라도 알지 못할 거야.
이상으로 바라보는 것과 현실을 살아내는 것의 차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이 땅에 남아 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은 체 게바라도, 피델도, 유럽이나 미국인들도 아니었다. 평범한 남미 사람들이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기념품 티셔츠 속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분했다. 이상하게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건 잘못 믿고 이득을 취하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거지 체 게바라에 대한 건 아니야. 종교도 마찬가지잖아. 신을 잘못 믿거나 신의 이름 아래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과 신을 연결시키면 안 되는 것처럼 …!
- 일단 체 게바라는 신이 아니야. 난 그냥 모든 이상과 이념 안에는 결점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세상에는 엄청난 이상도, 완벽한 이념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 넌 내가 왜 좋아?
- 뭐?
-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남미라는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배낭여행객이고, 이상이나 이념을 의심 없이 완벽하다고 믿어 버리는 내가 왜 좋냐고.
…
- 혼자 남미로 배낭여행을 와서. 체 게바라를 좋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나랑 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