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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Jul 09. 2021

필리페, 넌 결혼이 필요한 친구야

엘 칼라파테,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를 가기 위해서는 숙소가 있는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한 번 더 들어가야 했다. 터미널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는데- 마침 출발을 앞둔 버스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승객으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엘 칼라파테를 가려는 여행객들로 이미 만석이었다. 단 한 자리. 필리페의 옆자리만 빼고.



시원한 향수 냄새. 필리페에 대한 첫인상은 향으로 남아있다.


앉자마자 시원한 향수 냄새가 났는데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향이었다. 필리페의 뒷자리에는 필리페 부모님이 앉아계셨다. 누군가가 손으로 찌르길래 뒤를 돌아봤더니 - 아들을 부르려던 필리페 부모님의 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필리페 가족 틈에 껴서 엘 칼라파테를 여행했다.


필리페는 콜롬비아 메데인 공항에서 비행기 수리를 하는 엔지니어였다. 해외여행이 처음이신 부모님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바라봤던 필리페. 하지만 필리페 본인도 아르헨티나에 오기 전, 딱 한번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봤다고 했다.


해외여행을 딱 한번 해본 사람이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전부를 가진 자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의 구도처럼 느껴졌다. 필리페는 나와 동갑이었고, 장남이었고 밑으로 두 명의 여동생이 더 있다고 했다.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필리페의 부모님은 정이 참 많으신 분들이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는데 내가 당연히 알아듣고 있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통역을 해주는 필리페가 없는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가 뭘까, 또 얼마나 재밌고 웃긴 이야기들일까-' 너무 궁금해서 필리페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빙하를 보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배 안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배가 빙하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침묵하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대자연 앞에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과수 폭포에서 느꼈던 에너지와는 또 다른 에너지였다.



쩍- 쩍-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고요한 순간 조차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빙하는 그렇게 깨지고, 물속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수박이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고래가 바다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잠수할 때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빙하가 깨지는 소리는 그러했다.



필리페 부모님은 점심을 챙겨 오셨다. 세 명을 위한 음식을 네 명이서 나눠 먹었다.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축구 경기도 보고, 마을로 돌아와서는 저녁도 함께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헤어졌다.


콜롬비아로 돌아간 필리페는 가끔씩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부분 부모님이 날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내 이름을 발음하며 어떻게 웃으시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졌다.





그 후, 필리페는 결혼을 했다. 다른 소식들은 잘만 전해줬으면서 - 결혼 소식은 전해주지 않아 조금은 섭섭했던 것 같다. 결혼 후에도 계속 메시지가 주기적으로 왔지만 본인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따로 묻지는 않았다. 비행기를 고치는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아시아로 여행 오고 싶다는 이야기 등이 주였다.


… 그러던 중 필리페가 본인의 이혼 소식을 전해 왔다. '결혼 소식은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이혼 소식은 또 전해주네'라는 생각을 했다.



결혼 생활이 2년 만에 끝나버렸어


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지?' 난감해졌다. 결혼 소식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게 말해준 적이 없으니 "너 결혼했었어?"라는 걸 먼저 물어봐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럴 때 나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아, 그랬구나."



필리페는 부인이었던 사람이 얼마나 나빴는지, 이혼 후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한참을 털어놨다. 오토바이를 타고 콜롬비아의 카리브 해안을 달리고 있는 사진도 보내줬다. 사진만 보면 흡사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 이상하게 '필리페가 지금 슬프고 외롭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슬프면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나에게까지 이런 걸 다 털어놓을까, 싶었다. 그러다 '아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감정을 솔직하게 다 털어놔도 다음 날 얼굴 붉히며 만날 일 없을 테니까. 나는 자신을 판단하지도, 혹은 판단을 내린다한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이니까. 그렇게 필리페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어주었다.


결혼은 무덤이라는 말을 10번 넘게 했던 필리페. 자신은 원래 비혼 주의자였던 것 같다고,  남은 인생은 오롯이 자신의 행복을 찾는데만 집중할 거라 말했던 필리페는…


그 말을 하고 정확히 2년 뒤,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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