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일주일 동안 함께 여행했던 친구가 떠났다. 여행에서의 일주일은 서울에서의 일주일과 많이 다르다. 특히 이렇게 고립된 지역에서의 일주일은 의미가 더 크다. 상념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떠나기 전 날 밤, 친구는 내 노트북에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옮겨주었다. 덕분에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함께 했는지 이야기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를 발로 느끼기 위해 2시간짜리 비행기가 아닌 50시간 가까운 버스를 탔고, 후회했고, 하지만 결국엔 크게 웃었다.
"내가 왜 너를 좋아한다고 말했는 줄 알아? 그건 내가 일주일 내내 너랑 함께 있으면서도 너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야 너도 만만치 않게 이상했거든? "
친구는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사실 친구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는 쑥스러운 상황이 오면 늘 장난으로 받아넘기는 습관이 있다. 친구도 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줬으면 싶었다.
새벽 5시. 아직 아침 해가 뜨지 않아 밖은 깜깜했다. 친구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덩치만 한 큰 배낭을 고쳐 메며 환하게 웃었다. 첫날 내가 봤던 그 천진난만한 표정.
"조심히 가. 보고 싶을 거야."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한 말은 나쁜 뜻에서 한 말이 아니야. 난 널 여전히 잘 모르지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는 게 있어. 넌 이 여행을 통해 조금씩 변하고 있고, 여행이 끝날 때쯤엔 더 많이 변해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난 변하는 게 무서운데."
"무서워하지 마. 넌 분명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
"진짜 갈게."
"안녕."
"안녕."
자신이 했던 말을 한번 더 설명해주는 걸 보니 친구는 내 말 속에 담긴 뜻은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가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부쳤다. 친구가 떠나면 혼자 오랜 시간 생각하고 쓰려던 엽서였는데 - 먹먹한 감정 탓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게 불가능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인사만 짧게 썼다. 그렇게 안부를 전했다.
사실 친구는 칠레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 칠레가 가장 자랑하는 아름다운 국립공원이라 했다. 친구와 조금 더 함께 여행하고 싶었지만 감정에 취해 트레킹을 따라나서면 또 싸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나는 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친구가 제안을 해 온 그 순간,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을 택했다. 누군가에게 맞출 필요도 없고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여행을 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새벽 5시 인사를 나누고 호스텔을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내 결정을 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싶었다. "잠깐만! 나도 같이 갈래!"
물론 친구의 이름은 부르진 않았다. 대신 닫히는 문을 바라봤다. 친구가 떠나면 바로 다시 잠들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애꿎은 노트북을 켜고 그간 찍은 사진들을 다시 봤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4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우수아이아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오늘 그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지난 일주일을, 떠나간 친구를 생각했다. 다음에 누군가와 또 이렇게 정이 든다면 무조건 상대보다 하루 일찍 그 장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를 혼자 바라봐야 하는 건 괴로운 일이니까.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던 테이블 끝 자리, 빈 침대, 마시고 남은 술병, 고치겠다고 다 뜯어 놓고 결국 고치지 못한 벽시계 등을 혼자 봐야 되는 게 싫었다.
문득 펑펑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또 잠이 들었다.
'세상의 끝'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까. 우수아이아는 '세상의 끝'에 자신들의 발자취를 남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많은 여행객들과 동화같이 아름다운 풍경도 우수아이아 그 자체가 품고 있는 쓸쓸함과 황량함을 메꾸지는 못했다.
친구가 떠나고 부둣가에 나가 한참을 서있었다. 일주일 동안 있던 곳이었는데, 또 새로운 것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지는 시간, 외로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두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제까진 보지 못했는데 친구가 떠난 오늘에서야 그 사람들이 보였다. 부두로 나오는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혼자였고, 오랜 시간 아무런 미동 없이- 난간에 몸을 기대거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간혹 저녁식사를 끝마친 커플들이 나와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분명 그리워하는 대상이 있을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곁에 있어도 외롭다고 느낀다거나. 사람들은 모두가 이기적이고 외로우니까. 바람이 불고, 머리가 바람에 날리고, 바다는 잔잔하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고.
해가 지자, 배들은 불을 밝혔다. 그 빛으로 바닷 물결의 일렁임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 숙소로 향하려 발길을 돌리자, 부두에 혼자 서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살짝씩 미소를 주고받았다. 미소뿐이었지만 -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이었다.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