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베베를 만난 건 늦은 밤, 호스텔 로비에서였다. 루크와 럼주를 탄 핫 초콜릿을 마시고 있는데 로비 컴퓨터에 앉아있는 한 아이가 보였다.
같은 동양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국 사람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한국을 떠나온 지도 꽤 된 시점이었고, 한국말도 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베베는 웃음을 띄며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지, 내가 아는 척하는 게 싫은가' 돌아서려는데 -
"나 네가 무엇을 물어봤는지 알아. 너 내가 한국 사람인지 물었던 거지?" 영국식 영어로 베베가 말했다.
나는 정말 베베가 한국 사람인 줄 알았다. 베베는 웃으며 익숙하다고 했다. 유럽이나 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 늘 듣던 질문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체 게바라 때문이었을까, 쌍둥이자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 <해피투게더>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공통점을 가지고 남미를 여행하고 있던 우리는 잃어버렸던 쌍둥이 자매를 찾은 것처럼 빠르게 친해졌다. 나는 베베와 나누는 대화가 너무너무 재밌었다. 옆에서 연신 지루한 표정을 짓던 루크는 이만 들어가 자겠다고 말했다. 우리 중 누구 하나 루크를 말리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뿐.
여행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극적이게 잘 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베베도 그랬다.
남미를 여행하다 보면 어떤 나라에서든 누군가와 한 번씩 사랑에 빠진 경험을 하게 된다. 베베도 이미 사랑을 한번 경험하고 우수아이아로 넘어온 아이였다.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홍콩 남자.
홍콩에서 밴드 보컬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현재는 잠시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느끼고, 좋아하는 낭만적인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부유하는 사람들은 부유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베베는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영국으로 이민을 간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에 가지는 애정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영국에서 산 시간이 훨씬 더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영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처럼 여겼다. 모두가 베베를 '중국계 영국인'이라고 말하는데도. 중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언어가 된 지 오래인데도. 베베는 계속 그렇게 부유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와 <해피투게더>
베베도 남미에 온 이유가 나와 비슷했다. 우리는 서로가 사랑에 빠진 도시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리우 데 자네이루가 있었다면 베베에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있었다.
너 혹시 쌍둥이 자리야?
베베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니 "넌 말하고 행동하는 게 딱 쌍둥이자리에 태어난 사람이야"라고 웃으며 말해주던 베베. 그날 이후 나는 내 별자리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베베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민자였던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을 다 보고 자란 베베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영국의 명문대를 들어가는 일, 수학을 공부하는 일 같은 것들 뿐. 작가가 되는 건 그 안에 없었다.
"돌아가면 인턴을 마친 뒤, 영국에 있는 큰 은행에 취직하지 않을까 싶어."
미래를 말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희망에 차 있다. 하지만 저 말을 하는 베베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인턴', '영국', '큰 은행'. 이런 단어들에서 느낄 수 있는 슬픔들.
베베는 호주에서 지낼 때 여자를 사랑해 본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함께 손을 잡고 호주의 해변가를 걸었던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늘 누군가에게 안기거나 업히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를 안아주고 또 업어주었다는 말. 그리고 그 기분이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는 말. (한 번도 호주에 가본 적은 없지만) 호주 해변가를 걷고 있는 베베와 베베가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중에 호주에 갈 일이 생긴다면 노을 지는 해변가를 꼭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 새벽 4시까지 대화를 나눴다. 40시간은 더 이야기 나눌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우리에겐 일정이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우린 우수아이아 이후에 칠레에서 한번, 페루에서 한번 그렇게 2번을 더 만났다. 그리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베베는 인턴을 끝내고 정말로 영국의 큰 은행에 취직을 했다.
너무 힘들어.
베베는 바쁜 은행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만난 홍콩 남자도 그리워했다. 영국에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홍콩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자꾸만 했다.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털어놓을 곳도 나 밖에 없었겠지.
가끔씩 저렇게 메시지가 오면 나는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 런던 시간을 검색했다. 보통은 늦은 밤 시간이었다.
그러다 베베는 대학이 운영하는 기관에서 저널리즘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퇴근 후 잠깐씩 하는 공부였지만, 일종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게 베베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극을 쓴다고 말하자 "우와 너는 꿈을 이뤘구나! 정말 대단해. 나는 현실에 타협하고 말았는데"라고 말하던 베베.
베베는 그 이후 휴가가 생길 때마다 홍콩으로 갔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콩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나는 베베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을 소개해 주었다. "체 게바라와 해피투게더를 좋아한다면 이 책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야."
베베는 <아비정전>을 좋아하는 내게 <화양연화>와 <2046>을 꼭 볼 것을 추천해줬다. 남미를 떠나기 전 베베는 영문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구해 내게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페루에서 <화양연화>와 <2046>을 보았다. '치파'라 불리는 페루식 중화 볶음밥을 먹으며 그렇게.
***
베베는 한 동안 작가가 되는 꿈을 간직하는 듯 보였지만 더 이상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때 만나던 남자와는 헤어지고 새 사람을 만나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영국에 유학 온 홍콩 남자였다. 베베의 남편은 2018년 겨울, 도쿄 디즈니랜드를 함께 여행하던 중 베베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베베는 내게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별 후, 울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 중일 때였다.
"나 결혼할 거 같아! 넌 무조건 내 결혼식에 와야 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만난 홍콩 남자를 그리워하던 베베는 결국 다른 홍콩 남자를 만나 결혼한 것이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베베의 결혼식만큼은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터졌다. 런던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결혼 축하해! 내 쌍둥이자리 친구!"
"고마워, 내 쌍둥이자리 친구! 런던은 언제 올 거야? 보고 싶어!"
베베와 또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밤이 새는 것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