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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Apr 22. 2021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아버지를 위한독서치유테라피

6세기 페르시아에서 전해지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다.


‘인도의 샤푸리 야르왕은 아내와 남자 하인의 밀회 장면을 목격하고 질투심에 그들을 죽여버린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자, 세상 모든 여자를 상대로 복수를 결심한다. 신부를 맞이하여 결혼한 후, 결혼식 다음 날 죽여버리기를 반복한다.


온 나라의 처녀들과 그 가족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 그때 그 나라 한 신하의 딸 세헤라자데는 자진하여 왕의 신부로 들어간다. 결혼 첫날밤, 그녀는 왕에게 세상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아침이 되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왕은 세헤라자데를 살려두기로 한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렇게 천일 하고 하루 동안 이야기가 계속된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샤푸리왕을 지배하던 미움의 상처는 사라지고 세헤라자데를 향한 사랑이 자리 잡는다.’


나도 이야기가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것을 믿는다.


아이들이 어릴 적, 퇴근 후 하루 종일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하면, 문 안쪽서 두 녀석들이 후다닥 현관으로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면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마냥, 엄~마! 하며 뛰어나온다.  


가방을 내려놓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아이들은 각자 자기들이 좋아하는 책이랑 장난감을 꺼내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잘 시간이 되면 책을 집어 든다.  


“마녀는 지네와, 해골과 뼈와 도깨비 손톱을 갈아 넣고, 젓고 또 저어~ 끔찍한 마법의 수프를 끓였어요. 한 그릇은 귀신에게 먹이고~ 또 한 그릇은 도깨비에게 먹이고~ 마지막 한 그릇은….. 네가 먹어요!” 하고 온갖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을 동원하여 읽어 주면 아이들은 꺄르륵 넘어가며 재미있어하다가 “또!”를 외쳤다. 두 번, 세 번, 어떤 날은 같은 책을 열 번쯤 반복해 읽은 날도 있다.


목도 아프고 몸은 힘들었지만,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아이와 같이 하는 시간이 천국 같았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지나 보니, 그 시간들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치유해준 시간이었다.


십 년이 넘은 시간들인데도, 아직도 내 무릎 위에 앉아 책 읽는 걸 듣고 있던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 샤워를 마친 머리와 몸에서 나는 살 냄새,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아이로부터 올라오던 온기의 기억은 내 영혼을 따뜻함으로 가득 채운다. 아직도 귓가에 “또!”를 외치던 아이의 어릴 적 목소리가 생생하다.


나는 지난 3년 성경과 책 속 이야기를 통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행복해졌다. 많이 읽으니 글로도 쓰게 되었다. 아직 모자란 점이 많지만 50의 나이에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 뛰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주변에, 특히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책을 권한다. 그런데 책을 통해 행복해진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어느 정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공감을 하는데, 전혀 책을 읽지 않았던 사람들에겐 그 장벽이 너무나도 높다.


나 또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고백하건대 학창 시절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결혼 후부터였다. 나의 독서는 순전히 실리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육아책, 재테크를 위한 부동산 관련 책, 그리고 직장생활에 필요한 리더십 책으로부터였다. 지식을 얻기 위한 책 읽기가 즐거움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책 읽는 것의 즐거움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 전부터 ‘행복해지는 책 읽기, 돈 되는 책 읽기’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연히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이란 제목의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창조적 독서 치료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에는 책 읽기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독서테라피의 효과가 설명되어 있었다.


‘책은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하여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거나 장애가 있을 때, 무기력해지고 힘든 노년기를 겪을 때, 책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내면을 통찰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 독서는 분명 우리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는 힘을 가졌다.’


이 글을 읽자 아버지가 떠올랐다. 몸을 움직이시지 못하고 누워계신 지 오래, 당신의 살아있음과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신문 읽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려는 아버지. 아버지께 책을 읽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 앞에 섰다. 이야기를 통해 왕의 마음을 치유했다는 인도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며, 첫 책은 류시화 시인의 인도 우화집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마라.’를 골랐다. 짧은 호흡의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라 첫 시작으로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 제가 책을 많이 읽고 행복해졌는데 아버지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서요.”


이해하기 어려운 딸의 설명에 아버지는 어리둥절하시며 그러라고 하셨다. 막상 책을 읽어드리자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짧은 이야기마다 결말을 예측하려고 노력하셨고, 의외의 결말에 오호 그건 생각도 못한 결말인데! 하며 재미있어하셨다. 재미있으니 좋다고 하셨다.


한 시간 남짓, 책을 읽어 드리고 웃고 이야기하다 다음엔 어떤 책을 읽고 싶으신 지 물었다.


“나는 삼국지나 손자병법을 읽어보고 싶어.” 신기하다! 나도 늘 읽어보고 싶어 책장에 모셔 뒀던 책인데. 아버지랑 나랑 같네! 신문을 보실 때나 스포츠 중계 보실 때도 기업전략, 경기 전술 그런 거에 늘 관심이 많으시더니. 그래서 내가 기업에서 전략일을 하게 됐나?


다음 일요일 아침, 삼국지, 손자병법, 그리고 혹시나 어려운 상황 속 아버지에게 용기가 될까 하고 ‘로빈슨 크루소’를 가방에 넣어 친정으로 향했다. 한 권 한 권 책 표지들을 보신 아버지는 당신이 읽겠다고 하신 책들을 두고 ‘로빈슨 크루소’를 고르셨다.


고통 속에서도 절망적인 무인도를 탈출한 주인공의 인내와 용기에 힘을 얻고 싶으셨던 걸까?


책을 읽어가며, 주인공 아버지가 아들의 모험을 만류하는 대목에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또한 책에 나오는 성경 속 ‘돌아온 탕자’ 이야기도 해드렸다.


그러다가 다시 성경 속 다윗 이야기가 나왔고 다윗이란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아버지. 유럽에 가셨을 때 다비드 상 보신 적 있으시죠?” 했다. 기억이 안 나신다고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가 예전 여행 사진첩을 가지고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그 사진첩 속 50대 초반의 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멋지게 옷을 차려입으신 완전 훈남이셨다. 80년대와 90년대 중소기업을 어렵게 운영하시며, 기업들 간 가격경쟁이 심해져 먹고살기가 어려워지자, 수출할 거리가 있을까 난생처음으로 유럽 박람회에 가셨다고 한다. 그랬던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아버지는 뚫어져라 보고 또 보고 계셨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육체 안에 갇혀, 타인에 의지해 살아야만 하는 매일을 미안함으로 사느라 잊고 있었던, 178센티의 잘생긴 중학교 배구선수 출신으로,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수출탑까지 받았던 기업인이었던 빛나던 자신의 모습을 길게 응시하고 계시는 거였다!


무기력하게 힘없이 늘어져 있던 아버지의 눈빛에 새로운 에너지가 생겨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사진첩을 들고 있는 팔이 저려 오는 것도 잊은 채 “아버지 진짜 멋있으셨네!”를 반복해서 외쳤다.


로빈슨 크루소의 3장을 읽은 후, 너 목 아프니 오늘을 그만하자고 하실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책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유럽과, 아버지가 유럽여행을 다녀오셨던 1990년 유럽으로 같이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그 여행 속에서 아버지는 멋진 예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안에서 당당한 가장이었던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실 수 있으셨다. 


얼마 전 카톡 메시지로 받은 헬렌 켈러의 ‘3일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싯구가 떠올라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헬렌 켈러가 쓴 이런 시가 있거든요. 아버지도 시를 한번 지어보세요. 내게 3일간 걸을 수 있다면? 그 뒤를 모라고 쓰시겠어요?”


“3일간 걸을 수 있다면….. 난 걸을 거야. 그 3일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얼마나 다시 걷고 싶으신 지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짧은 한마디 말은 그 자체로 시가 되었다.


엄마는 “힘들겠다. 너무 애쓰지 마. 그래도 네가 이렇게 해주는 마음이 고맙다. “하셨다.


애쓰는 게 아니다. 예전 아이들과의 책 읽기에 대한 추억이 나의 영혼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듯,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나눈 이 시간들의 추억이 내 평생에 얼마나 큰 선물이 될지 알기에 책을 읽는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기쁨이니 멈추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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