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다의 그 해 여름(2017)> (Summer 1993)
가슴이 터질듯한 답답함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이유없이 엄습한 슬픔에 압도당해 얼어붙어본 적은 있으신가요? 열심히 산다고 살고 있는 나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이 수렁 같은 감정의 순간. 우리는 이 감정의 주체로서 이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함에도, 불행하게 단서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그 순간. 몇 번이고 찾아오는 그 순간들마다 우리는 짐짓 태연한 척 씩씩하게 일상을 살아나가지만, 이런 순간들의 반복이 거듭되면서 애써 무시하고 스스로 억압해왔던 감정과 욕구들이 우리의 내면 밑바닥에 보이지 않게 쌓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쌓여가던 감정과 욕구들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일상으로 새어 들어와, 우리의 삶을 잠식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나에 의해 갇히고 억눌린 감정과 욕구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영화 <프리다의 그 해 여름>은 국내에서 개봉된 제목이고, 이 영화의 카탈루니아어 원제목은 <Estiu 1993>이고, 글자 그대로 1993년의 여름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제목도 영화의 원제목을 영어로 그대로 번역한 <Summer 1993>입니다.
감독은 1986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카를라 시몬입니다.
이 작품 이전까지는 학교를 다니며 만들었던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 두편정도가 필모그래피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2017년, <1993년 여름> 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그녀는 자신의 색깔과 재능을 분명하게 보여주며 이 작품이 자신의 첫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재능있는 감독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바탕이 된 걸로도 유명한데요,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는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니아어를 사용하여 본인이 실제 살았던 카탈루니아의 한 마을 가로트하에서 진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의 프리다역에는 2008년생의 라이아 아르티가스가 맡아 프리다역에 다른 배우는 절대 대체불가능한 수준의 프리다를 보여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라이아의 얼굴 표정과 커다란 눈만으로도 프리다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완벽하게 표현될 정도였으니 말이죠.
영화는 바르셀로나에 살던 6살의 프리다가 어느 날 AIDS로 부모를 모두 잃고 외숙모, 외삼촌, 사촌 동생이 살고 있는 카탈루니아의 가로트하라는 외진 곳으로 내려가 살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지만 아직 부모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외삼촌 가족들과 진정한 가족관계를 이루기까지의 고충과 외로움, 도시와는 전혀 다른 시골생활의 적응과정 등이 프리다의 관점에서 내내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1993년의 여름>이 프리다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여름인지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구조로 영화가 진행됩니다. 중심 드라마인 프리다에서 시선을 조금 다른데로 돌려보면 귀여운 두 아역배우들의 천진하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카를라 감독이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대사를 외우기 보다는 상황을 주며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영화를 본다면 두 아역배우들의 역량에 자연스럽게 경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가로트하 지방의 여름이 지닌 풍성하고 눈부신 아름다움과 소박하지만 매우 이국적으로 보이는 가로트하 마을의 실제 축제 장면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보는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부모를 모두 잃은 6살의 프리다는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외진 시골로 내려가 외삼촌 가족과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6살이라는 어린 나이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6살의 사람은 자신이 살고 싶은 장소도, 함께 있고 싶은 사람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인간이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 존재하듯 그녀역시 그렇게 내던져 진 모양새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들에게 세상은 부모와 친척, 친구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에게 이사나 전학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물리적 환경의 변화만을 일컬을 수가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런 이동이 자신들이 속하고 알아왔던 세상의 변화, 즉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다행스럽게 환경적 변화이외의 큰 변화를 겪지 않게 되는데, 공간적인 이동이외의 다른 요소들의 변화, 즉 부모나 그 밖의 가족구성원에 있어서는 큰 변동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리다와 같이 불행한 소수의 아이들에게 이런 변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야만성을 띠는 경우가 있습니다.
프리다의 경우를 볼까요. 그녀의 경우, 영화의 시작부분에 나오듯이 자신의 의지 혹은 선택이 아니라 어른들의 결정으로 정든 곳을 떠나 자신이 살던 도시와는 전혀 다른 시골로 내려가야했고, 이미 한 가족으로 공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외삼촌가족의 또 다른 일원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프리다에게는 이미 충분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누구보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녀가 온당히 받아야 하는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었던 부모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것은 그 어떤 변화보다 커다란 변화,즉 위와 아래, 좌와 우가 모두 바뀐, ‘전복’에 가까운 변화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느닷없이 전복되어버린 세상에 내던져진 프리다가 감정을 표면으로 끌어올리지 못해, 6살 아이답지 않은 건조함을 보이는 것도, 급작스런 전복이 가져온 잔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를 잃어 슬픔에 빠져 있어야 할 소녀 프리다는 어쩐 일인지 영화의 거의 마지막까지 슬픔을 내비치지 않습니다. 다만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응시 할 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프리다가 여느 아이들과 달라 보이고, 심지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와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이처럼 영화의 거의 마지막 까지 어떠한 감정도 눈에 띄게 내비치지 않는 그녀의 모호한 얼굴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상대역시 그녀의 감정를 알리 가 없고, 서로가 정확한 감정을 알지 못하니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못하니 기존에 이미 구성되어 있는 집단에 합류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프리다는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타인의 관심을 끌기위해 과도하고 억지스런 행동들을 하게 되죠. 이 행동들은 물론 역효과를 낳게 됩니다.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작된 6살 인생의 비극적 일상은 성인인 우리가 견뎌내기에도 힘겨울 실존적인 위기에 프리다를 빠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의 주체가 되기에는 한없이 어려보이는 프리다이건만, 본능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삶에서 바깥으로 밀려나 있음은 물론, 자신을 원하는 타인이 없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개인으로서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한 존재, 즉 실존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운 이유는 프리다가 겪는 고통과 위기가 6살이 겪기엔 너무 엄중하고 본질적인 성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정한 외삼촌 부부는 프리다에게 잘해주려고 노력을 하지만, 소통이 없는그들의 관계는 한 곳으로 수렴될 수 없는 평행선을 긋는 듯 했습니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려는 노력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상호 이해가 없으니 결과는 뻔했죠. 어렵게 한 발짝 다가가고, 어이없게 두 발짝 멀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외의 상황, 외로움의 정점에서 프리다는 행동에 나서게 되고, 이 순간 그녀의 닫혀있던 내면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던 분노의 감정이 솟구치며 그녀의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배출해야 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배출은 역설적이게도 유입을 이끌었습니다. 프리다가 열어놓은 자신의 마음의 문틈 사이로 그녀의 감정이 나갈수 있었지만, 외삼촌 가족의 감정이 들어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죠. 이렇게 프리다와 외삼촌 가족의 감정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가족을 갖게 된 프리다는 마침내 6살 어린이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동안 억압되어있던 그녀의 슬픔은 한순간에 솟구쳐 나와 방안을 가득 메웁니다. 그러나 6살의 프리다는 자신이 왜 우는 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프리다가 겪었던 소외와 실존적 위기는 6살의 아이가 겪을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프리다 아닌 그 누구도 겪어서는 안될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영화 ‘나의 산티아고(2015)’의 주인공 하페 케르켈링은 잘 나가던 자신의 커리어와 삶에 한 순간 제동이 걸릴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견디다 못한 그의 신체가 그에게 급작스런 신호를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떠나온 순례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까워 지는 어느 길 위에서 하페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후 그는 변화하기 시작하죠. 자신의 정체성과, 신의 존재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하던 하페는 그 울음이후 마치 답을 알게 된 사람처럼 정확한 눈빛과 적합한 행동으로 익숙한 세상을 새롭게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일상이 나를 엄습하여 이유없는 슬픔으로 내려 눌러서 마침내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면, 그 순간이 바로 우리의 슬픔을 쏟아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모든 감정들을 억눌러서 마냥 담아놓을 수 없는 한계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프리다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환경에 던져져서 적응을 강요당했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는 프리다의 자연스러운 모든 감정을 억압했고, 이로인해 그녀의 삶은 위태해졌습니다. 자신도 모른채 억압되었던 슬픔이 터져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새로운 삶을 살아나갈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새로운 환경의 적응이 주는 어려움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고통스러운 현실을 쏟아내고 나서야, 그녀는 6살 아이같지 않게 갇혀있던 감정의 지옥에서 벗어나 정확히 자신의 나이에 맞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페 역시,순례자가 되어 길을 나서지 않았더라면 화려한 공적 생활을 구실로 애써 억눌러왔던 정체성에 대한 번민과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지난 세월 자신의 순수를 망가뜨리고 자신을 변모시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체 살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번민과 회의의 시간 동안에 억압되어있던 고통은 순례자로서의 고통과 함께 임계점에 다다르자 마침내 그의 모든 육체를 관통하여 뿜어져 나오듯 쏟아졌습니다. 고통을 인정하고 나서야 고통을 쏟아낼 수 있었고, 고통을 쏟고나니 더 이상 그에게 번민과 회의의 시간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번민과 회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는 아마도 고통과는 무관한 무언가가 들어섰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시달려 본적이 있느냐고 물으며 시작했었죠. 그렇게 가슴이 터질듯이 답답하고, 이유없이 슬프다는 건 우리의 마음의 공간이 거의 다 차있음을 우리에게 알리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프리다처럼 그리고 하페처럼 우리는 우리를 슬프고 힘겹게 하는 그 감정들에 억눌려있음을 인정하고 분출하여 떠나보내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억눌려진 감정은 처음에는 그저 우울함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지만 점차 우리의 삶 전체를 통제하고, 결국 우리가 우리로서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