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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실 동화

결혼이야기( Marriage Story) (2019)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그럼 그 순간으로 한번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이유를 떠올려 볼까요? 수많은 이유들을 나열할 수도 있겠죠. 이 사람들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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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장점들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은 내가 숭배해야 할 장점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전적으로, 이유 없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이고, 사랑하는 중인 것이죠.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만큼 이별도 경험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이별은 자신의 세상을 뒤엎는 사건이겠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함께 키웠던 부부에게 이별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 이상의 상황 변화를 가져옵니다.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부부에게 냉엄한 현실적 문제가 끼어들면서 이별은 심지어 가장 반-로맨스적인 것이 되고 말죠. 우리의 어린 날을 함께 했던 신데렐라와 같은 동화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들의 동화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요. 오늘의 영화 “결혼 이야기”를 통해 현대적 동화의 엔딩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결혼 이야기는 2019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입니다.

감독 노아 바움백

감독은 1995년에 데뷔하여 미국의 동부지역, 그 중에서도 주로 뉴욕에 거주하는 지성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해 탁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노아 바움백입니다. 이미 이 영화는 그간 바움백 감독이 보여주었던 어떤 영화보다도 짜임새 있는 각본과 주연배우 및 조연배우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으며, 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수 부문에 수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변호사로 열연한 로라 던이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로라 던, 아담 드라이버, 스칼렛 요한슨

남편 찰리 역에는 아담 드라이버, 아내 니콜 역에는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되어 전 세계 관객들의 격한 공감을 얻어냈고, 니콜의 변호사인 노라역을 맡은 로라 던 역시 캐릭터에 빙의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려내어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극단을 이끌고 있는 찰리와 니콜은 8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는 부부입니다. 찰리는 극단의 감독으로 창의력과 실력을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있어, 극단이 아직은 다소 재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업계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아내 니콜은 이 극단의 주연배우로서 어린 시절 LA에서 티브이 드라마에 나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전력이 있으나 뉴욕에서 남편 찰리를 만나 바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살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 둘이 서로의 장점을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얼마지 않아 이것이 이혼을 결심한 두 사람이 함께 받는 커플 상담의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혼관련 상담중인 니콜과 찰리

극단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니콜은 엄마와 언니가 살고 있는 LA의 집으로 아들 헨리를 데리고 떠납니다. 그 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오랜만에 출연할 수 있는 티브이 드라마가 있어 카메라 테스트를 받게 되고, 그곳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인 노라를 추천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니콜은 자신이 언제나 연극이나 영화의 감독을 원했음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혼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이혼사유가 찰리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와 꿈이 무시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니콜의 집에 들른 찰리는 니콜이 이혼 과정에 변호사를 고용하여 이혼소송을 걸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이혼 전문 변호사를 찾습니다. 찰리는 처음에는 저렴하고 온건한 변호사를 구했으나 그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자 비용이 몇 배는 비싸지만 니콜의 변호사만큼 실력이 좋다고 알려진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고, 이 이후 둘의 법적 다툼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법적 다툼에 지쳐버린 니콜과 찰리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하나, 둘의 대화는 처음부터 삐걱거리더니 결국 폭언과 막말, 오열로 끝이 나고, 이혼으로 끝이 난 결혼에 대한 서로를 향한 분노와 슬픔을 둘은 털어놓고 나누게 됩니다.

images (8).jpg 쌓인 것들을 다 끄집어 내놓는 두사람

이후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며 둘의 이혼 과정은 합의로 마무리됩니다. 1년이 지나고, 니콜의 집을 찾은 찰리는 니콜의 남자 친구와 아들, 니콜의 가족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UCLA에서 전임직을 맡아 LA에 계속 머물 것임을 알려주며, 둘은 1년 전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각자 자신의 길로 향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fff.JPG 1년 후 새로운 현실속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두 사람




사랑-한 순간의 영혼의 부딪힘 그리고 온통 낭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1995년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은 기차안에서의 우연한 눈빛의 부딪힘에 자신들의 운명을 느낍니다. 이것은 일생에서 어쩌면 단 한번 찾아올 로맨스임을 감지하는 것처럼 말이죠. 마크 웹 감독의 2009년 영화 500일의 서머에서 톰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이 듣던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서머를 만나 한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느끼죠. 벤 팔머 감독의 2015년 영화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에서는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 낸시가 다른 여자의 데이트 상대였던 잭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심장박동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영화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한 순간에 심장을 점령당하는 주인공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KakaoTalk_20200531_145008350.jpg (위) 비포선라이즈, (아래 왼쪽부터) 500일의 썸머,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

태어나 처음 만나는 낯선 이에게 갖게 되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감정.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멈추어지지도 않는 감정의 격동.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에 빠져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는 감정. 그 누가 말린다 해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감정. 그런 감정이 누군가에게 생겨났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맹목적이고, 사랑은 마법이고,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는 등의 많은 표현들은 사랑이 갖는 현실을 초월한 혹은 가장 비현실적인 낭만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바꾸어 말하면 일생에서 우리가 가장 낭만적이 될 때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바로 그 시점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곧 낭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별-다만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 그 뿐

데렉 시안 프란스 감독의 2010년작 블루 발렌타인의 딘과 낸시. 낭만적인 운명적 만남으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 그들은 그로부터 5년 후 서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들로 변해버립니다. 한 공간에 있기보다는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행복할 수 있도록 이들을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미칠 것 같던 사랑과 낭만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요.

KakaoTalk_20200531_153508732_01 (1).jpg 낭만적 사랑에 빠져 함께 하고자 했던 낸시와 딘. 그러나 낭만이 빠져나가니 날카로운 현실만이 두 사람을 마주한다.


사라 폴리 감독의 2011년작 우리도 사랑일 까에서는 결혼 5년 차인 마고의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결혼생활이 그려집니다. 이런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남편을 떠나 이웃집 남자를 만나게 되지만 이내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는데요. 마고는 어떤 이유로 결혼생활이 공허하다고 느낀 걸까요.

남편과 함께하는 공허함, 이웃집 남자와의 새로운 충만함

사랑의 모든 것이 낭만이라고 본다면, 결혼은 낭만을 파괴하고 사랑을 증발시키는 악한 제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 본다면 말이죠. 결혼 이야기에서 니콜 역시 찰리를 만나 2초 만에 사랑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찰리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자신의 꿈인 배우도 버리고, 자신의 고향인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떠나 뉴욕에 정착해서 찰리를 도와 극단을 함께 운영했다고 말이죠. 이런 니콜 역시 끝내 찰리와의 이혼을 결정합니다. 정말 결혼 때문일까요? 결혼이 이 모든 주인공들의 삶에서 낭만을 앗아가 버린 단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낸시가 딘을 떠나고, 니콜이 찰리를 떠난 진짜 이유는 결혼으로 인해 현실이 낭만의 자리를 점점 차지하여 가던 어느 날, 문득 낭만이 모두 사라지고 현실뿐인 상황 속에 내던져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낭만이라는 안개가 걷히고, 누군가의 무언가로만 살아간다고 느끼며, 자신의 자아가 실종되어 버렸다고 느끼는 순간, 이들에게 결혼은 더 이상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희생이고 구속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니콜이 써 내려간 찰리의 수많은 장점들도, 제시가 출간한 셀린과의 사랑이야기도 결국엔, 사랑을 붙잡고 낭만을 되돌리기보다는, 자신을 묶어두고 기만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사랑하게 만들었던 상대의 모든 장점들은 오늘날 고스란히 혐오하여 멀어지게 만드는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와의 헤어짐에는 수많은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당신 안에 있던 상대에 대한 낭만이 사라지고, 그리하여 사랑이 사라져 버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죠.


현실-간헐적 낭만의 연속

영화 속 니콜과 찰리는 이혼을 확정 짓기 전에 서로를 죽일 듯이 비난하며 싸웁니다. 그러나 사랑했던 상대에 대한 저주와 비난은 자신에 대한 혐오로 되돌아오고, 결국 둘은 오열하고 위로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이별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구름 위를 걷는 느낌으로 사랑에 빠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이별을 택한 후, 우리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혼 후 동료들을 만나서 부른 찰리의 노래 가사처럼 ‘나를 너무 잘 알고 나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아프게 하지만 내가 살아있음을 알게 해주는 사람’, 즉 사랑과 이별이 곧 살아있음 자체인 만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나의 잃어버린 반쪽, 내 운명의 상대를 만나 낭만에 빠져들어 자신을 잃을 만큼 몰입하고, 사랑에 허우적거리고, 그리고 이별하는 일들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운이 좋다면 여러 번 반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KakaoTalk_20200531_155948338.jpg 이별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만남의 속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현실이 그 옛날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 속의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가끔씩은 그저, ”그래서 공주와 왕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도 족한 사랑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의 일상인만큼 지독하게 낭만적인 이야기도 가끔은 필요하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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