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2015년에 나왔던 캐롤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카리스마넘치는 매력의 케이트 블란쳇과 순수한 아름다움의 루니 마라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고, 결국은 다시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노련하고 세련된 연출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캐롤은 잘 만들어진 퀴어영화나 레즈비언영화 혹은 페미니즘영화로 비추어졌습니다.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고, 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면 이 영화는 반드시 여성영화이고, 레즈비언 영화여야만 할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동성간의 관계가 그려진 영화들만큼은 표면이상의 것을 보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사실 그런 영화들역시 모두가 공감할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있는 작품들에 불과한데 말이죠. 우리의 시선이 피상적 차원을 벗어날 수 있는 깊이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떠한 작품이든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플로베르나 모파상의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듯한 느낌에 18세기의 여류화가 비제 르브랑의 작업을 보는 듯한 아름다우며 격동적인 영화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역시 우리의 그러한 시선이 반드시 필요한 작품입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2020년 1월에 개봉한 프랑스 작품입니다. 감독인 셀린 시아마는 1978년 생으로 2004년에 단편영화로 데뷔, 2007년에는 릴리 워터스로 장편영화에 데뷔하여 최고의 데뷔작상을 수상하며 등장과 함께 실력을 인정받은 실력파 감독입니다. 국내에서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큰 사랑을 받게되면서 '톰보이'나 '워터 릴리스'같은 그녀의 전작들이 거꾸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의 그간 쌓아온 기량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작품으로, 프랑스 자국내의 찬사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주인공 엘로이즈역은 믿고 보는 연기력을 가진 프랑스 국민배우 아델 에넬이 맡아 그녀 고유의 쉬크하고 꾸밈없어 보이나 강렬한 연기를 보이며 자신의 캐릭터가 지닌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잘 살려주었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 마리안느역에는 커다란 눈에 짙은 눈썹, 하얀피부를 가진 믿기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 노에미 매를랑이 맡아 상대역인 아델 에넬의 강렬함과는 대비되는 카리스마로 영화의 균형을 잘 잡아주었습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감독인 셀린과 엘로이즈역의 아델은 2007년 릴리 워터스로 만나 2018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촬영직전까지 연인관계였으나 헤어졌고, 이후 친구관계를 유지한 채 작품을 촬영했다는 점입니다. 아델 에넬의 작은 동작, 미세한 표정변화까지 옆에서 바라보듯 스크린에 담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셀린감독이 카메라뒤에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후반 한 화실에서 마리안느는 학생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몇 년전 마리안느가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꺼내놓게되고, 영화는 그 작품을 바라보던 마리안느의 과거로 거슬러가게 됩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고적한 저택으로 향하는 마리안느는 사실 그 저택의 귀부인에게 의뢰를 받아 밀라노로 보낼 딸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전통에 따라 가문에서 결혼을 정해놓은 남자집안에 딸의 초상화를 보내기 위함이었죠. 그러나 귀부인의 딸이 앞서 한차례 초상화를 거부한 사례가 있어서 귀부인은 특별히 딸에게 알리지 말고 초상화를 제작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다음날 초상화의 대상이 될 귀부인의 딸인 엘로이즈와 해안가로 산책을 나가기 전 하녀인 소피를 통해 엘로이즈의 언니가 해안가 절벽에서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되는 마리안느. 산책을 나가 처음 만나게 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예측할 수 없는 자기만의 사고방식을 지닌 묘한 매력을 지닌 사람임이 넌지시 비춰집니다. 엘로이즈의 이런 캐릭터가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 중요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마리안느는 의뢰받은 대로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지만 직접보지 못하고 기억에 의존한 채 완성해야 했습니다. 엘로이즈에게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지 않았던 마리안느는 자신을 화가라고 밝히고 자신이 그린 엘로이즈의 그림을 보여주지만 엘로이즈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이에 마리안느는 그림의 얼굴을 지워버리죠.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를 본 귀부인은 노여운 마음에 마리안느에게 당장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돌연 엘로이즈가 초상화를 그리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고, 이로인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직접 바라보며 그녀를 그릴 수 있게 됩니다.
그 이후 귀부인이 며칠 저택을 비우게 되고, 이 기간동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귀부인이 저택을 비우자마자 하녀 소피의 낙태를 위해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고, 이 외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둘은 점차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마침내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이가 됩니다. 특히, 소피의 낙태를 도와줄 여인을 찾아 바닷가 마을로 내려갔던 밤에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 그 눈빛에 빠져 치맛자락에 불이 붙은 채 걸어가는 엘로이즈. 이 장면은 단적으로 이미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감정이 고조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 이날 밤 이후 둘은 서로를 원하는 마음을 더 이상 숨기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영원히 잊지않을 사랑의 기억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고, 함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죠. 이와 동시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함께 초상화를 그려내며, 표면아래 감춰진 깊은 감정과 마주 하는 시선을 담아내게 됩니다. 한 장, 또 한 장 초상화가 그려질 때마다 초상화 속의 화난듯한 엘로이즈의 표정은 온화한 미소를 품고있는 표정으로 변해갑니다.
완성된 초상화는 엘로이즈와 귀부인 모두를 만족시키게 되고, 곧바로 밀라노로 보내지며, 이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얼마 전부터 보게 된 흰 옷을 입은 엘로이즈의 환영 그대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있는 엘로이즈에게 격정적인 포옹으로 이별을 고하고 저택의 문을 빠져나가려는 마리안느의 뒤에서, 뒤를 돌아보라는 엘로이즈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잠깐 드러났다 곧바로 사라집니다. 신화속 에우리디케의 모습처럼 말이죠.
엘로이즈와 헤어진 후 마리안느는 그녀를 우연히 두 번 보게 됩니다. 한번은 초상화 속의 모습으로, 다른 한번은 비발디의 사계가 연주되던 연주회장에서 감정의 격동속에 결국 미소짓는 그녀를 먼 발치에서 말이죠.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의 죽음은 오르페우스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그녀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지하세계의 모든 이들과 왕마저 감동시켜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거의 입구에 다다를 즈음, 사랑하는 그녀를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잊고 뒤를 돌아보는 우를 범하고, 그것으로 에우리디케는 영영 지하세계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르페우스신화의 내용이죠. 영화의 큰 구도, 즉 반드시 헤어져야만 하는 두 연인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감독은 오르페우스신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에는 고전의 품위가 더해져 두 사람의 사랑이 한결 성스럽게 비추게 되지만 감독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인문학적 창의력을 폭발시킵니다.
감독은 전 인류가 모두 알고 있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안타까운 이별장면을 기존의 방식인 오르페우스의 관점이 아니라 에우리디케의 관점으로 재조명 합니다. 즉, 에우리디케의 운명은 단순히 오르페우스의 어리석음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 자신이 오르페우스에게 돌아다보라고 말함으로써 이별을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가냘픈 여성으로서 이별을 당해야만 하는 객체적 입장이 아닌, 이별의 주체로서의 에우리디케를 생각해 냄으로써 감독은 관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강인한 여성상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감독의 관점으로 다시 한번 들여다 볼까요?
여기 두 여인이 있습니다. 한 명은 18세기 후반의 귀족의 관습대로 이미 결혼상대가 정해져 조만간 이탈리아로 떠나 한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하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의 순수함을 지닌 캐릭터로 수도원에서 살며 자연과 음악, 책을 벗삼아 고요한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끌려나온 상태죠. 그런 그녀는 자신의 삶이 아닌 가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그녀앞에 예정되어 있는 것은 자신이 사라져버린 삶, 곧 죽음과 같은 삶일 것입니다.
반면, 18세기의 여성예술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해도 남자들 뿐인 세상에 자신의 이름으로 용감하게 진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화가를 업으로 삼아 귀족의 요청으로 초상화를 그리러 올 정도의 실력과 명성을 지닌 마리안느는, 마치 음악으로 만인의 찬사를 받던 오르페우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험한 바다를 건너고 깊은 숲을 헤치며 엘로이즈의 저택으로 가는 모습 또한 에우리디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을 연상케합니다.
신화에서처럼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지만, 또한 운명적으로 이별을 해야합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헤어져야만 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든 순간은 가장 진실에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가온 이별의 순간, 슬픔에 복받쳐 뛰쳐나가는 마리안느의 뒤에서 침착하게 뒤를 돌아보라고 말한 사람은 엘로이즈였습니다. 마치 이별을 주도한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처연하게 작별을 고하듯이 말이죠. 짧은 시선의 마주함을 끝으로, 엘로이즈는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합니다. 이미 잘 알려진 결말, 그러나 이 결말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숨어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냄으로써, 영화는 오랜 세월 무대위에 함께 있었으나 조명받지 못했던 또 한 명의 사랑의 주역에게 온당히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생각과 시선안에 갇혀 살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시선안에 담긴 세상을 세상의 전부라고 치부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는 “나”가 아니라 “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아주 많은 시간동안 잊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이런 자기중심적인 시선은 마리안느가 화가라는 사실에서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라는 행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상 그린다는 것은 그려지고 있는 무엇 혹은 누군가가 당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하나의 사랑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자기중심성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사랑의 행위 혹은 사랑이라는 상태는 상대가 있는 행위임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나”로서만 존재하는 우리는 사랑마저 자신의 관점에서만 판단해 버립니다. 사랑으로 얻은 행복, 불행, 불안, 만족등의 감정들 역시 자신을 기준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작 나의 상대방은? 그 사람 역시 나와 같은 수준의 감정에 도달해 있는 걸까? 이 질문을 잊은 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피상적 감정에 도취된 나머지 그 아래에 감춰져있는 깊은 감정들에 도달하지 못한 자기기만일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엘로이즈를 바라보며 그린 마리안느의 초상화가 온통 분노뿐인 엘로이즈였던 것처럼 말이죠.
내가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 역시 그 사람이 바라보는 누군가가 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전제해야하며, 그 누군가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시선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깊이를 지니게 됩니다.
2013년에 나온 자전적 에세이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Levels of Life)”에서 줄리안 반즈는 자신의 생명과 같았던 아내를 잃은 상실의 상태를 뛰어난 필력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what is taken away is greater than the sum of what was there. this may not be mathematically possible; but it is emotionally possible.”
(둘이었다 하나된 사람에게 상실이란, 빼앗긴 건 하나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긴 것을 의미한다. 수학적으로는 말이 안되지만 감정적으로는 말이 된다.)
관계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서 상실의 정의는 다를 수 있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게 된 후 느끼는 공허함은 단순히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시간, 공간을 비롯하여 함께 나누었던 모든 경험들 역시 나의 삶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 즉 총체적인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nd it was strange, I thought, that sorrow lasts and can make a man look forward to death, but the mood of victory fills a moment and then is over”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슬픔이 지속되서 그것 때문에 인간은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가도, 잠깐 승리의 기분에 사로잡히면 바로 슬픔은 끝나버린다는 거지.)
그러나 200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V.S.나이폴의 말처럼, 인간의 간사함이 결국 인간을 구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삶의 아이러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은 총체적인 상실감에 허우적 거리는 우리 인간이지만 어느새 그 상실의 공허함을 상쇄할만한 여지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삶의 에너지를 얻어버립니다. 아내를 잃고 몇 년간 입을 다물었던 줄리안 반즈였지만, 결국 그의 재능인 글쓰기를 통해 그는 상실감을 상쇄시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내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영원한 작별을 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였지만 서로가 그려진 그림과 그림을 그리던 서로의 모습, 그리고 둘만의 추억을 채워준 음악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상실감을 상쇄시켰죠. 홀로 함은 그 사람이 곁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고, 그 없음의 지속은 우리를 상실로 이끕니다. 그러나 끝없는 상실감은 그에 못지 않은 상쇄작용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떠나고 시간은 흐르지만 추억만은 그 자리에 머물며 그 때의 우리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