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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메리 크리스마스

by 무비 에세이스트 J

모든 것에는 그것의 가장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인 정수가 있다. 인간관계를 놓고 보자면 이것의 정수는 신뢰가 아닐까 싶다. 또한 공간의 정수는 그 공간을 한때 채워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의미 있는 기억일 테다. 기억을 담고 있지 않은 공간은 그저 장소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12월의 정수는 무엇일까? 나에게 그것은 언제나 크리스마스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12월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시간과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남게 될 시간들의 합이었던 것 같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산타 할아버지와 착한 아이들에게만 준다는 선물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언젠가부터 12월은 나에게 그런 대상이 되어 버렸고 나는 그렇게 프로그램화되어 살아왔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지나가야겠다.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살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공기의 결이 조금만 달라져도, 바람의 내음이나 질감이 보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알아차린다. 그래서인지 12월이라는 계절이 가진 계절적 특성이 주는 독특한 감성에 빠져 지내는 것도 사실이다. 한 해가 끝나는 마지막 달인 12월이 풍기는 낭만적 비애감이 슬프도록 좋고, 하얀 눈과 가장 잘 어울리는 12월의 차갑고 메마른 공기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내가 이토록 12월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12월이 선물처럼 품고 있는 크리스마스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나 기다리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지 말았으면 했던 크리스마스가 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말은 나와 내 온몸의 세포가 온 힘을 다했던 기다림의 시간이 4시간뿐이라는 의미이고, 4시간이 지나면 12월의 마법은 그 힘을 잃고 온순한 얼굴로 다가오는 새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나에게는 또다시 11개월이라는 기다림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다지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된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두고 보니 지난 몇 년간의 참담했던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코로나 접종을 하고 홀로 작업실에 앉아 끙끙 앓다 집에 갔던 거칠었던 그 해를 시작으로, 내 사랑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너무나 잔혹한 아픔이 되어 차라리 느끼지 못하고 잽싸게 넘겨버리고 싶은 가혹한 고통의 시간이 되었었다. 어떤 해에는 크리스마스를 건너뛰기 위해 크리스마스가 오기 며칠 전부터 미친 듯이 번역작업에 몰두하며 비겁하게 크리스마스를 헌납하기도 했고, 또 어떤 해에는 크리스마스를 카운트하면서 못 먹는 맥주로 영혼을 교란시켜 크리스마스와 마주치는 그 극적인 순간을 희석시켜버리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은 지나갔다. 다행히. 이것 역시 마법 같은 일이다. 그리고 다시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면 특별히 자랑스러운 일을 해낸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나를 토닥거리며 잘했다고 할 만한 것을 꼽자면 다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나의 정수를 복원하게 된 일일 것이다. 나를 규정하게 만드는 정수가 몇 가지는 되겠지만 그중 하나, 크리스마스에 설렘을 느끼는 이 마음이야말로 내가 영원히 잃고 싶지 않은 정수 중 하나이다.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온다. 잠시 보지 못했던 너.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앞으로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기다릴게.

널 똑바로 바라봐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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