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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기다리며

by 무비 에세이스트 J

그런 날들이 있었다.


분주한 엄머와 할머니의 부엌을 바라보며 괜스레 가슴이 쿵쾅거리고, 온 집안을 들어낼 듯이 샅샅이 청소를 하는 아빠를 보면서 내 마음까지 정화된 듯 밝아지던 그런 날들.


아침이면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야무지게 세수를 하고 작년보다 짧아진 한복을 입고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혼자 씩 웃던 그런 아침도 있었다.


새로운 얼굴로 나타난 달력의 숫자 따위 개의치 않고 한살이 더 얹어진 내 어깨의 무게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고 새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에 마냥 마음이 달떠 시간이 빨리 가기를 손꼽아 기도하던 그런 날들.


세배 행렬로 늘어선 아이들 틈에 끼어 부모님의 돈봉투 더미가 낮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저 중 어느 것이 나의 것일지만 초집중하던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런 날들을 시간이 저만치 밀어내버린지도 한참.


여전히 설날을 준비하시는 엄마의 부엌에는 할머니대신 내가 어설프게 한자리를 차지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건 없어도 그래도 다행히 전 하나만큼은 확실히 배웠기에 엄마의 산 같은 노동을 조금은 줄여드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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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설날에 부쳤던 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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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 맛까지 꽤 괜찮으니 나로서는 전을 부치고 나면 엄청난 만족감에 기쁨이 차오른다. 부엌에서 엄마일을 도와드릴 일이 이것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을 부치고도 여전히 분주한 부엌에서 이러저러한 일에 손을 보태고 있으면 그제야 동생 가족이 도착하고 작은 아빠들과 그 가족들이 들어선다. 이제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고 해마다 만나고도 항상 헷갈리는 아이들의 나이를 확인하다 보면, 밤은 깊어가고 쌓아둔 이야기들이 점차 거실을 가득 채운다.


다음날 일찌감치 차례를 지내고 나면 드디어 본 게임, 세배타임이 다가온다. 어릴 때의 나야 특히 이 시간을 위해 눈 빠지게 설날을 기다렸지만, 지금의 나는 전날 준비해 둔 세뱃돈을 확인하며 봉투의 이름을 재차 확인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님께 작은 아빠 두 분 내외분께 세배를 드리고 준비한 세뱃돈을 건네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나면 조카에 사촌 조카의 절까지 받고 어색하게 봉투를 건넨다. 아직은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듯 몹시 어색하기만 하다.


이 모든 아침 세리머니의 대미는 역시나 굴이 듬뿍 들어간 울 엄마표 떡국이다. 우리 집은 소고기보다는 굴을 선호하기 때문에 언제나 떡국에는 굴이다. 물론 만두도 한 두 개씩은 들어가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조금은 단촐해진 설날이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은 여전히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새해를 정겹게 맞이하고 있다. 새해를 함께 맞는다는 것이 평범한 일상에서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일인지, 나를 무조건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를 나이 먹어가면서 한 해 한 해 깨닫는 중이다.


이제 설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미리 세뱃돈은 준비했으니 내일은 전을 부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속속 도착하는 가족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며 맛있는 저녁을 먹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찾아올 모든 설날이 딱 이번 설날만 같기를 바란다. 여전히 건강한 부모님, 가족들과 딱 이만큼만 즐거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조카 중에 내년에 대학에 가는 아이가 있으니 세뱃돈은 더 나가겠지만 조카의 성장때문에 더 많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 꼭 올해 설날같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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