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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첫눈이 아주 조금 내렸다. 조금 더 늦게 눈을 떴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귀한 눈이었다.

얇게 덮여있는 첫눈을 보며 집을 나섰다. 조심스레 눈에 발을 디뎌보았다. 내 발의 무게에 눈이 다칠까 하여. 내 발 모양 그대로를 그저 담아낼 수 있도록 살살 발자국을 만들며 걸었다.

그렇게 걷다 걷다 문득, 너무 오래 잊고 있던 어떤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흐린 하늘이 주는 신비스러운 우울함을 좋아하고, 한순간에 너무 쉽게 빛을 주는 조명보다는 그저 자기 주변만을 묵묵하게 밝혀주는 소박한 촛불의 빛을 더 좋아하고, 한여름에 LP로 캐럴을 들으며 지글거리는 소리에 낭만을 느끼던 아이.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마치 계절의 문지기라도 되는 양 봄의 방문을 몹시 기다리던 아이. 장마철만 되면 빗속으로 뛰쳐나가 우산을 뚫을 듯 두르리는 빗줄기 속에서 마치 인어공주처럼 가벼운 물거품이 되어 무거운 빗줄기 사이사이로 유유히 날아오르는 장면을 상상하던 아이. 단풍잎의 반짝거림을 한 조각이라도 지니고 싶어, 매년 한 두 개의 단풍잎을 가져와 정성스레 날짜를 써놓고 모아두던 아이. 눈이 오면... 아... 눈이 오면 그 고귀한 아름다움에 정신이 아찔해져서 첫 발자국을 만들기 위해 무조건 뛰쳐나가던 아이.


그 여자아이가 아주 오랜만에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나에게 다가와 눈부시게 웃으며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햇살 같은 그녀를 나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 서있었다.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녀는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고.

넌 항상 너였다고...


오늘 눈이 왔다. 내 오랜 그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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