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라인드 (2007)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독이 든 사과를 자신의 수양딸에게 권하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미모를 확인받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그녀는 백설공주의 계모다. 어린 시절 마냥 동화로만 이 이야기를 접한 전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백설공주를 응원했고 한 마음으로 계모를 미워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주인공은 예쁘고 착하며 사랑받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백설공주를 계모는 어쩌다 그리도 미워하게 됐는지 혹시 처음에는 백설공주를 좋아하지는 않았을지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백설공주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래 왔다.
어른이 되고 보니, 어렸을 때에 당연하게 여겼던 세상의 넓이란 것이 어린아이로서 볼 수 있었던 최대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어른의 눈으로 동화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야기의 가운데 서있는 주인공 말고도 그 그늘 아래로 늘어서 있는 주변 인물들이 시선에 들어온다. 동화, 소설, 영화를 막론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각 개인들 고유의 경험의 프리즘을 거치게 되고, '동화 속 주인공'이라는 문구가 실제 삶을 살아내는 대다수에게 괴리감을 주게 되는데, 이는 현실 공간 속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른이 되면서 조연의 삶에서 보다 많은 공감대를 갖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이 있다. 디즈니의 메가 히트작 겨울왕국이 눈의 여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졌다는 것이 알려지며 더욱 유명해진 동화이기도 하다. 동화는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악마의 거울 가루가 눈과 마음에 들어간 착하고 아름다운 소년 카이가 눈의 여왕을 만나 그녀와 함께 그녀의 궁전으로 가버리고 난 후, 카이를 사랑하던 겔다라는 소녀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카이를 구출하러 눈의 여왕이 사는 궁전을 찾아가 결국 구출해서 데려온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2007년에 개봉한 네덜란드 영화 블라인드 역시 눈의 여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원작 동화가 소년, 소녀의 모험담을 이야기의 가운데에 두고 눈의 여왕을 가장자리로 내몰았다면, 영화는 눈의 여왕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가졌던 여러 의문들 - 제목과는 달리 실제 내용에서는 눈의 여왕의 비중이 없는 이유, 자발적으로 눈의 여왕을 따라간 카이와 눈의 여왕의 드러나지 않은 관계에 대한 가능성, 눈의 여왕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궁금증 등 - 중 적어도 눈의 여왕과 카이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서만큼은 감독의 도움을 받아 우리 역시 어느 정도까지는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를 지렛대로 삼아 원작에 던져졌던 나머지 의문들에 대해서도 해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블라인드는 2007년에 개봉한 네덜란드 영화다. 1970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타마르 반 덴 도프 감독은 대담한 창의력으로 원작을 재구성하여 매우 섬세하고 동화 같은 로맨스를 그려냈다.
남자 주인공 루벤 역은 벨기에 배우 요런 셀데슬라흐츠가 맡아 동화책에서 걸어 나온 왕자님 같은 외모로 전 세계 여성 관객들에게 불멸의 설렘을 주었다.
여자 주인공 마리 역은 네덜란드의 국민배우 할리나 레인이 맡아 뛰어난 연기와 독특한 외모로 그녀만의 마리를 각인시켰다.
영화 블라인드의 두 주인공은 마리와 루벤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루벤은 이제 갓 소년을 벗어나 청년이 되고 있는 홍안의 소유자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짐승처럼 난폭해진 그를 위해 어머니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하지만 다들 오래가지 못해 그만둔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낭독자로 어딘가 비밀스러운 마리가 찾아오고, 그녀는 첫 만남에서부터 루벤을 제압한다. 사실 마리는 어릴 적 학대로 얼굴과 온몸에 흉측한 상처가 가득하다. 이렇게 남들과 다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루벤 앞에서만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루벤은 눈의 여왕을 읽어주는 마리의 기품 있는 목소리와 단호한 행동에 관심을 갖고, 마리를 아주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 상상하며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처음인 마리 역시 낯선 이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고 마음을 연다.
하지만 루벤이 수술로 눈을 치료할 수 있게 되면서 마리는 자신을 보고 실망할 것이 두려워 그의 곁을 떠난다.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루벤은 가장 먼저 마리를 보고 싶어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어 방황하게 된다. 마리를 찾지 못해 절망한 루벤은 마리가 읽어주었던 눈의 여왕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찾게 되고, 그 도서관에서 일하던 마리와 조우하게 된다. 자신의 눈으로 마리를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 루벤. 그의 눈동자에는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마리. 마리는 또다시 그의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뒤늦게 마리가 남긴 쪽지를 보게 된 루벤은 쪽지 속에 마리가 적어놓은 가장 순수한 사랑을 회복하여 마리를 되찾기 위해 커다란 결심을 하게 된다.
영화나 책에 나오는 수많은 악당들에 대해 우리는 '언제부터 저들이 악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이는 마치 우리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인식하는 방법과도 같다. 우리가 태어나서 최초로 그들을 인식했을 때부터 우리는 그들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불렀다. 그들도 한때 젊음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애써 그들의 주름 안에 감추어진 젊음의 흔적을 누가 찾아본 단 말인가. 그들은 그저 할머니이고 할아버지일 뿐인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악당들은 처음부터 당연하게 악당이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영화 블라인드의 여주인공 마리는 알비노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에게 학대를 받는다. 알비노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적으로 가해진 범주화를 통해 그녀는 철저하게 사회의 비주류로 성장하게 된다. 1692년 미국의 세일럼에서 발생했던 마녀재판을 떠올려 보자. 마녀와 일반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던 것은 어떠한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었다. 다름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쪽에서 내세웠던 비겁하고 위선적인 주장이 전부였고, 그렇게 시작된 재판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마녀로 몰린 사람들의 위축된 목소리는 다수의 폭풍 같은 고함에 휩쓸려 철저하게 묻혀버렸다. 한 사람이 마녀가 되는 데에는 다수의 커다란 목소리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주인공 마리의 고독과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의 다름을 배척하고자 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몰염치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범주화로 인해 그녀는 사회 밖으로 내몰렸다. 공동체 내 다수의 묵시적 합의는 손쉽게 그들을 일방적 가해자의 위치에 올려놓기 때문에, 다수에 포함되지 못한 소수는 저절로 피해자가 돼버린다. 마리도 그렇게 피해자가 되어 그늘 속에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마리의 차가움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웃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을까? 웃음은 웃음으로 유발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의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랑은 어떨까? 사랑은 웃음과는 다르다.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 가능하다. 왜일까? 사랑을 먼저 보여주면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동화 속 눈의 여왕은 캐릭터의 이름이 말해주듯 사랑 같은 따듯한 감정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럼에도 카이를 처음 만나던 날, 애처롭게 자신의 썰매에 매달려있는 카이를 선뜻 태워 자신의 망토로 감싸주기까지 한다. 그녀는 왜 카이를 썰매에 태워서 자신의 성으로 데려간 걸까. 성에 데리고 간 다음에 이 둘은 어떻게 지냈을까? 영화 블라인드의 창의성은 바로 이 지점, 둘의 관계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빛이 나는 것이다.
혼자 외롭게 지내는 마리의 마음의 상태는 흉터투성이인 그녀의 겉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별과 학대로 상처 받고 위축되어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럼에도 루벤의 구애와 고백에 반응을 보인다. 상처 받은 마음을 지녔지만 마음 자체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한 상처도 아닌데 그 상처로 언제까지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상처 받은 마음도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상처가 없는 마음보다 사랑이 더욱 필요할 수 있다. 그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루벤의 사랑에 호응하며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열어보이고, 인정하고, 그 상처에서 자유로워졌다.
진정한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하는 삶을 선사한다고 칼릴 지브란은 말했었다. 루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 마리는 마침내 편견과 차별의 대상에서 자유롭고 지적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마리는 더 이상 남들의 편향된 시선과 진정성 없는 친절에 상처 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다. 단 한 사람의 순수한 사랑은 이렇게 그 사랑의 대상을 해방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 비틀즈는 옳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다시... 사랑이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 갖는 첫인상은 우선적으로 눈을 통해 형성되고 그런 다음 목소리, 전체적인 분위기, 어투, 패션 스타일, 체형 등의 순서로 확장된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을 실질적으로 알기도 전에 우리의 판단을 일정 방향으로 종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수용할지 말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첫인상을 오감 중 겨우 하나인 시각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루벤은 장님이다. 그리고 마리는 온몸이 흉터투성이다. 루벤이 장님이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얼마만큼의 안도감을 주었을까. 일설에 따르면 첫인상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시각적 요소이고, 그다음이 청각, 후각 순이라고 하니, 루벤에게는 마리의 지적인 목소리와 향기가 그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첫인상이었을 것이다. 시각의 방해 없이 온전히 받아들인 그녀의 첫인상을 통해 루벤은 자신만의 그녀를 상상했고, 그녀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그가 느끼고 사랑에 빠진 마리는 외모의 흉터 따위에 가려져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진정한 마리 그 자체였고, 그녀 자체로서의 마리는 상냥하고 열정적인 빛과 같았다.
만일 루벤이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어서 그녀를 눈으로만 판단했다면, 과연 그녀와 함께 사랑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맹목적이고 순수한 열정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그 감정의 낙원에 들어가 볼 수 있었을까?
우리가 눈으로 본다는 것은 보는 즉시 판단으로 이어지게 되어있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판단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기준을 전제로 하여 설정되어있다. 사랑은 분명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나 '나에게' 일어난 사랑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현상이 되어야 하며 나와 나의 대상 간의 고유한 암호여야 한다. 유치하든, 엉터리든 나의 암호, 우리의 암호가 된 이상 그것은 나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이지, 결코 그들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맹목적(blind)이고, 영원하며 헌신적인 감정이다. 그 자리를 대체할 다른 감정은 없으며, 이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루벤의 결단은 그러므로 온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