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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soyo Oct 16. 2024

Flâneur

 대학 시절 편도 2시간 거리를 통학하던 지하철에서 나는 대체로 바삐 즐거웠다. 나에게 그 매일의 4시간은 어쩔 수 없이 때워야 하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박물관을 관람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스물한 살. 24시간 기숙사에 있던 고등학생의 세상 경력과 별다를 것도 없었기에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과 행동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디서 내리는 사람일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저런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이고 어떤 상황인 걸까? 그 진실이야 어찌됐든 나는 나의 구경, 나아가 관찰을 토대로 이 사람의 성격을 만들어보고, 저 사람의 인생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몽상에 그쳐 연기처럼 사라졌고, 일부는 당시 내가 쓰던 대학 방송 대본의 주제나 키워드가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대학 생활, 외국 생활, 직장 생활을 거쳐온 지금도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다. 인생의 목표가 '최대한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죽는 것'이라고 했었을 정도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런 나는 일상 속에서 궁금한 대상을 찾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독서와 걷기, 두 가지를 즐겨 한다. 둘 중 걷기는 나에게 조금 더 무작위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오늘은 어떤 사람, 어떤 강아지, 어떤 식물, 어떤 건물, 어떤 색깔을 만날지 나가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서울이 뻔한 풍경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기도 하고, 같은 사람도 날마다 다른 것을 본다. 그리고 더 재밌는 것은 보려고 노력하는 만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내가 어느날 우연히 Flâneur(플라뇌르)라는 단어를 알게되었다.

출처 : chatGPT

 도시를 관찰하고, 경험하고, 탐구하는 사람? 완전 내 얘기잖아? 싶었다. 앞서 <윤슬>편에서 '이걸 지칭하는 단어가 있었다니!' 했던 것처럼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이 단어를 메모해두었다.


 최근 다녀온 베를린에서도 걷고 또 걸으며 관찰한 단면들을 글감으로 많이 쌓아두었다. 그리고 드디어 Flâneur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글감들을 풀어내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아, 나는 한참 멀었구나.'

나는 비로소 Flâneur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출처 : chatGPT


 단순히 걷고, 본다고 하여 Flâneur가 아니다. 깊이 관찰하고 사유하고 통찰해 내는 것이야말로 Flâneur의 자질인 것이다. 나는 세상을 궁금해하고 이야기를 상상해 보곤 했지만, 한 가지를 물고 늘어져 깊이 탐구하거나 통찰을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글감은 많았지만, 글로 풀어내긴 어려웠다.




 chatGPT가 설명해 준 대로 Flâneur의 어원인 flâner는 빈둥거린다, 산책하다, 어슬렁거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Flâneur가 의미하는 것은 가볍게 산책하고 돌아다니는 것 속에서 밀도와 깊이 있는 통찰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지난 기본학교 수업이 생각난다. 프랑스 사람들은 탁월함을 추구하기보다 '즐기자'에 가까운 마인드로 사는 것 같아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즐기자' 안에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 같다고 답하셨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편하게 즐기는 모습일지언정, 그 내면에, 심연에는 더 높은 수준의 사유를 해나가려는 마음이 있는 것. 어쩌면 그 '즐긴다'라는 것이 (흥청망청 노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특유의 사유의 수준을 높이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Flâneur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 설명이다.



 그 수준에 다다르기 어려울지라도 Flâneur를 추구하며 살고 싶다. 살방살방 놀며 산책하듯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산책도 사유도 진지하게, 집요하게, 하나에 대하여 깊이 있게 해야 Flâneur에 가까워질 수 있다. 치열한 깊이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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