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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Oct 27. 2020

매일매일을 사는 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조금 느려졌어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해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때 배우로 이름 날리던 할배들의 해외 여행기인 ‘꽃보다 할배’(종합편성 방송 프로그램)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할배들에게 스스로 아침을 먹고 돌아오는 미션이 주어졌는데, 카리스마 있던 모습은 간데 없이 밖에 나가는 것조차 머뭇거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레스토랑에 가서는 돈이 충분한데도 기어이 빈 속에 커피만 사 마셨다. 그나마 편하게 주문할 수 있는 것이 그뿐인 듯했다. 그럼에도 한껏 뿌듯해하며 상기된 모습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한다. 회사 다니는 딸이 짬을 내서 함께 나서는 여행이 모자라 혼자 파리에 가서 한 달 넘게 머물고 온다고 나섰다.

“엄마 이걸 누르고 확인을 누르면 돼. 간단하지?”

‘…’

“이걸 켠 다음에 목적지를 쓰고 돋보기를 누르면 돼. 이게 검색 표시거든. 쉽지?”

 ‘…’

“엄마 모르겠으면 이 종이에 나온 곳에 무료 전화를 해요. 그냥 여기로 하면 돼. 알겠지?”

 “… 응 응 아이 정신없게 왜 이래!”

세상이 편해졌다지만 엄마의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느덧 출국장으로 가는 줄에 선 엄마의 상기된 얼굴,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찌나 예쁘던지! 나 또한 세상의 속도가 나보다 빨라진 어떤 때에, 두 볼을 보올갛게 물들이며 차근차근 해내고 싶은 일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자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뭐 하나에 깊이 마음을 뺏긴 적이 별로 없는 내가 나이가 든다고 다를까 싶어서다. 두루두루 관심은 많아서 외국어, 운동, 요리 등 배워본 것도 다양하고, 이런저런 자원봉사, 여행 등 해보고 가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평소에 취미나 특기 조차 똑부러지게 대지 못하는 나다. 그러니 꿈은 고사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같은 거라도 누가 물어보면, 공허한 마음을 숨기려고 기억을 상실한 사람처럼 우물쭈물한다. 나는 왜 모든 것을 걸만큼 매달리는 것이 없나, 혹시 이렇게 살면 맹맛으로 사는 꼴 아닌가, 지천명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다니까 그때쯤이면 나아지려나, 근데 그때도 뭔가 새로 시작하고 싶은 의지가 나에게 있을까와 같은 생각으로 익숙한 조바심이 날 때쯤이면 부적처럼 새 한 마리를 떠올린다.


<태양을 먹은 새> 김기창, 1968, 31.5x39cm, 종이에 수묵담채, 운향미술관

                                                  

새의 몸뚱이와 대가리가 온통 붉다. 어딘가를 보고 있는 새의 눈동자도 같다. 금방 어디로 갈 것처럼 펼쳐져 있는 날개의 혈관에도 붉은 피가 돌고 있다. 새는 태양을 먹었다. 제 욕심에 자신이 타 죽을지도 모르고 이글거리는 태양을 냉큼 ‘삼킨’ 것이 아니다. 마음을 먹듯이, 차분히 태양을 ‘먹은’ 것이다. 작고 귀여워 보이지만, 어딘가 단호하고 숭고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새가 어떤 뜨거운 꿈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보고 있으면 나마저도 잠시 생기가 돈다. 마치 작은 모닥불일지라도 가까이 가면 피부가 따꼼거릴 정도로 뜨거운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하지만 빌려 쓴 생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나는 언제 저런 영롱하고 정결한 기운을 발산했는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매일매일이 도전이고, 해나가고 있어요”

꽃.할.배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문득 새의 시선에 관심이 갔다. 무엇을 보는 걸까? 어디를 향한 걸까? 혹시, 어제가 오늘로 온 방향, 오늘이 내일로 향하는 어디쯤은 아닐까? 인생의 기쁨이 꼭 무엇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익숙한 하루가 주는 성실하고 낯익은 도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꽃.할.배.처럼 매일매일에 붉어지는 마음이라면 어떨까?


이렇게 생각하니 붉지는 않아도 당장 볼개질 수는 있는 방법을 찾았다. 관심의 대상을 ‘하루’로 쪼개서 오늘 하루 설레는 일 한 개만 있으면 된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써 놓는 다이어리 한 켠에 며칠 동안 하루에 한 개씩 써봤다. ‘드디어 비가 왔다’, ‘000님이 (특강 강사로) 회사에 와서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했다. 그녀가 반짝거렸다.’, ‘아침에 일어 나니 매미 소리가 좋았다’ 이런 식일 뿐이지만, 다시 읽으면 가끔 작은 불씨가 포르르 떨리는 것 같은 때가 있다. 불을 꺼드리지 않기 위해서는 적시에 땔감을 넣어주고, 바람과 물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불씨를 지켜내기 위해서도 계속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 또한 좋은 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누가 꿈을 물으면 하루를 아끼고, 차근히 새로운 날들을 살아가며, 조금씩 오랫동안 설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겠다.


이 그림은 생전에 김기창(1913-2001) 화백의 방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집에 가훈을 걸어 두듯이 그 자신도 매일매일을 붉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하루를 태양같이 잘 살아보겠노라고 마음을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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