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하시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히 받아들여
산 내려와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산을 오르며, 도종환
성깔이 비슷한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 말로는 내가 더 심하다고 하는데, 성깔을 부리는 분야만 다르지 그 정도는 도긴개긴일 거다. 공통인 것은 남 피해 주는 것 둘 다 극혐. 동갑인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 낮 시간과 주말 시간이 꽤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놀 궁리를 하다가 주말 새벽에 만나기로 했다. 새벽에 만나 서울숲이나 올림픽 공원 등등을 산책한 후 커피 한잔을 하고 헤어지는 코스다. 시간상 아침에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가기 때문에 배 아플 걱정도 덜하고 우리의 새벽 산책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욕심을 부리기 전까지는.
그 친구는 생활체육인이어서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는 훌륭한 몸매의 소유자인데, 그것이 부러웠던 나는 그녀의 영역에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바로 등산이다. 배도 많이 나아진 것 같겠다, 아침에 빈속으로 가면 되겠다, 오라이! 가자!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이번주의 새벽 산책은 청계산 어때?라고 호기롭게 제안했다. 나의 장 상태를 알고 있는 그녀이기 때문에 아주 걱정스러운 눈빛을 흘려주었지만 난 괜찮다며 오히려 그녀를 격려했다. 그렇게 가게 된 청계산.
레깅스를 입고, 힙커버를 두르고, 보온병에 장에 좋다는 생강차를 담고 집을 나섰다. 손을 꼭 잡고 등산하는 50대 넘은 남녀를 보며, 그렇게 등산 동호회에 불륜이 많다던데 나는 설레서 긴장하면 배 아파서 바람도 못 피겠다는 둥 실없는 소리를 하며 산에 올랐다. 잠시 앉아 생강차도 한 모금 마시고.
한 1킬로 정도 걸었을까... 앞으로도 1킬로 넘게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가 바로 중간 지점. 청계산에 사람은 바글바글하고, 화장실을 가려면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딱 중간이라는 얘긴데, 같이 산에 가던 애를 버리고 나 혼자 뛰어 내려갈 수도 없고, 수풀과 나무는 무성하나 정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 숨을만한 곳도 안 보이고. 입은 옷은 롱치마가 아니라 레깅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먹은 것이라고는 생강차뿐인데 배가 아프다. 내 표정을 읽은 친구는 나보다 더 급하게 숨을 곳을 찾았다.
"야! 지금 사람 없어~! 빨리 저기 가서 볼일 보고 와~!"
"휴지 있어? 나 휴지도 없어~"
"넌 맨날 배 아픈 애가 휴지도 안 갖고 다니니?"
"휴지 갖고 다니면 왠지 더 배 아플 것 같아서"
"이 와중에 그런 말이 나오니?" 하며 주섬 주섬 휴지를 꺼낸다.
나는 얼른 받아 들고 숨는다. 레깅스는 왜 이렇게 딱 붙는 거며 정말 힙커버 안 두르고 왔으면 어쩔 뻔했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른용 짜개바지*라도 만들어야 하나 우울의 한숨을 쉬며, 두 큰 숨만에 볼일을 해 치우고 그 와중에 흙으로 잘 덮어 잘 자라고 인사해 주고 후딱 뛰어나왔다.
원래 산에서는 그런 거다 괜찮다고 친구가 얘기해 줬지만 창피한 마음 반, 민폐를 끼쳤다는 마음 반에 어떻게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는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정상까지 올라가겠다고 고집부린 나도 참.
무튼. 내려오며 결심했다. 이렇게 까지 된 이상 그냥 있을 순 없다. 병원을 알아봐야겠다. 그래서 이제 나의 병원 순례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 짜개바지 : 중국에서 아이들의 배변 훈련을 위해 엉덩이 밑을 터놓은 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