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항암 전날.
오늘이 그날이다. 종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기 보다는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아침에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밥을 먹고 걷기 운동에 나섰다. 대공원 한 바퀴 돌기. 걸으면서 상쾌하기는커녕 우울한 상념만 떠올랐다. 이러려고 운동하는 게 아닌데.
시초는 어젯밤부터였다. 꿈이 기분 나빴다. 뭐였더라? 꿈은 왜 항상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거지? 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무슨 문제집을 검사 맡아야 했다. 그러나 그걸 해오지 않았다. 다른 애들도 안 해왔는데 그냥 무사통과다. 나도 불안한 마음으로 빈 숙제를 내밀었다. 선생님은 내 것만 꼬치꼬치 살펴보았다. 난 퇴짜를 맞았고 졸업할 수가 없었다. 졸업식 같은 것은 없었지만 꿈에서는 늘 그렇듯이 저절로 알 수 있었다. 꿈에서 깨었다. 난 이미 졸업을 했잖아,라고 깨달았다. 그것 또한 꿈이었다. 난 또다시 꿈에서 깨었다. 진짜로 잠이 깨었다.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꿈에서의 불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자꾸 했다. 내일이 첫 항암 날인데 그저께 외박한 남편에게 화가 났다. 어제 아침에 들어오는 걸 보고는 별로 나무라지도 않았는데. 꿈꾸다 깨어보니 다시 화가 치솟았다. 첫 항암이 임박했는데 남편은 친구들과 술을 먹고 안 들어오다니. 그 친구들을 만나면 외박이 기본인 걸 알면서 바보같이 다녀오라고 했을까? 그의 타이밍은 어째서 평생 저 모양일까? 잘하는 듯하다가도 결정적일 때는 왜 엉망일까? 어제 내내 남편의 얼굴은 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본인은 숙취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이제 환자 남편 노릇하기 싫다는 얼굴 같아 보였다.
오늘 아침에도 그의 안색은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부지도 와 계신데 눈치 없이 구는 남편이 미웠다. 와중에 운동을 나섰으니 즐거울 리가 있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겨우 내게 말했다.
‘이러면 안 돼. 이래 봤자 나만 힘들 뿐이야.’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도 많이 달라졌다. 여행 가기 전보다는. 또 내가 환자가 되기 전보다는. 그도 분명 노력하고 있다. 외박 건 말고는 괜찮았잖아. 그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청계산 옆길로 접어들었을 때 “뜨드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뜨’와 ‘드’의 중간 발음 같은 소리였다. 딱따구리다! 너 어디에 있니? 높이 솟은 나무줄기들을 뒤져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뜨드르르!” 소리는 계속 들렸다. 맹물에 레몬즙을 몇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갑자기 마음이 상큼해졌다. 걸음마다 청량한 소리가 산길에 울려 퍼졌다. 내 가슴속에도 청량함이 울려 퍼졌다.
‘그래, 즐겁게 살자!’
마음을 다잡았다. 집에 돌아오자 어제부터 얹혔던 속이 한결 나아진 거 같았다. 이 정도면 고기를 먹어도 되겠다. 항암 전에는 잘 먹어둬야 하니까. 남편과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먹으면서 당부했다. 나를 돌보려면 당신 몸부터 잘 관리하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뭐랄까, ‘나도 힘들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말했다.
“내일이 항암이라는 게 실감 나지가 않아.”
“나도 자기가 항암 한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그도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거였다. 내일부터 그 무서운 항암이 시작된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요즘 마음을 다스리려 책을 읽으며 되뇌곤 했다.
‘항암 주사는 암세포만 녹일 거야. 암세포는 불완전하고 약하니까. 정상 세포는 멀쩡할 거야. 손상을 입더라도 금방 회복될 거야.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분명 항암 주사는 내게 이로운 작용을 할 거야.’
요점은 ‘항암 주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이거다. 방사선 치료 때는 어리석게도 “방사선이 암세포와 정상 세포 모두를 파괴한대.”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래서 그렇게 화상이 심했던 것만 같았다. 이번만큼은 부작용 없이 치료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항암은 내게 좋을 거야. 날 도와줄 거야. 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테야. 설사 부작용이 생겨도 즐겁게 지내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