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달리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오늘은 꼭 밖에서 뛰어보자고. 저녁 7시 20분, 조그만 크로스백에 물통과 핸드폰을 챙기고 도톰한 발목 양말에다 운동화를 신었다. 15분 정도 걸어서 서울대공원에 도착했다. 사위가 밝은 게 완전히 해가 지지 않았다. 막상 뛰려고 하니 저항감이 든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데다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어서 캄캄해져야 할 텐데. 먼저 한 바퀴를 걷고 나면 완전히 어두워지겠지.
대공원을 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해는 졌다. 촉촉한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내가 과연 뛸 수 있을까? 실은 제대로 뛰는 법을 모른다. 러닝화를 신지도 않았다. 요즘 집에서 ‘천천히 뛰기’를 30분이나 하니 실제로도 뛸 수 있지 않을까, 실험하려는 것일 뿐. 슬슬 걷다가 내리막길이 나왔을 때 이윽고 뛰기 시작했다(아무래도 내리막길이 만만하겠지). 마음이 앞선 탓인지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몸이 쿵쿵 울린다. 덩달아 가로로 멘 가방이 옆구리를 퉁퉁 친다. 아 이런 가방을 메면 안 되는구나. 가방끈을 최대한 짧게 줄여 등 쪽에 딱 달라붙게 멨다. 가슴 한쪽이 도드라져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다. 어둠에 가려지겠지. 내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뛰거나 말거나 남들이 크게 관심 가질 리도 없고.
가방이 등에 붙자 한결 낫다. 그런데 집에서 뛰는 거랑은 완전 다른걸? 귀찮은 가방도 가방이지만 훨씬 힘이 든다. 금세 허벅지가 뻐근해졌다. 나는 곧 달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역시 집에서 하는 제자리 뛰기와 실제 달리기는 다르구나. 30분을 뛴다고 스스로가 대견했는데 찻잔 속의 태풍 꼴인가.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이제 밤이 되어 산책 나온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봄가을엔 대개 아침에 여름엔 밤에, 과천 시민들은 서울대공원에 걸으러 나온다. 6월, 밤 산책이 늘어나는 계절이다.
두 바퀴째 다시 내리막 지점에 도착했다. 살살 걸었더니 뻣뻣했던 허벅지가 풀린 듯싶다. 가져온 물도 반 이상 마셔서 가방이 가벼워졌다. 이번엔 작전을 바꾸었다. 집에서 뛰듯 가볍게 느리게. 아까보다 뛸 만했다. 이거였어! 엉터리라 치부했던 나만의 ‘설렁 뛰기’가 정답이었다. 집안에서 만 오천 보를 걸을 때 가끔 하는 제자리 뛰기를 나는 ‘설렁 뛰기’라고 부른다. 마치 한량이 느른하게 놀 듯 대충대충 설렁설렁 뛰는 방식이다(주로 드라마를 보면서 뛰기에 그리된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뛰다가 벅차 지면 걸었다. 길게 걷고 짧게 뛰고를 반복하며 세 바퀴를 돌았다. 땀이 이마에 한가득 고여 물처럼 흐른다. 나는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땀을 닦아 털었다. 온몸이 땀 투성인데 찝찝하기는커녕 개운했다. 남편이 종종 말하던 ‘달리고 나서 흘리는 땀의 맛’이란 이런 거였군. 음, 하루키가 이 맛에 달리기를 하는 건가? 이러다 나도 하루키처럼 달리는 인간으로 등극하는 건가! 겨우 하루 뛰고 그것도 걷다가 뛰다가 하는 정도인 주제에 나는 한껏 기고만장해졌다.
내일은 거추장스러운 크로스백을 놓고 와야지. 물병은 손에 들고 핸드폰만 들어가는 허리 가방을 메야겠다. 그런데 나, 내일도 뛸 수 있을까(있겠지)?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2월, 나는 집에서만 웅크리고 있었다. 진행 중이거나 계획했던 강의와 모임들이 전부 취소가 되고 소박하게 벌여 놓은 일들은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신이 (있다면) 지구라는 영화를 돌리다가 퍼즈를 눌러놓은 것 같았다. 포식자를 피해 숨은 초식동물처럼 지내기를 2주일.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건 3월이었다. 일을 할 수 없으면 운동이라도 해야지. 2020년 새해 계획 중 하나가 근력운동을 하는 거였다. 늘어난 체중도 줄이고 체력을 키우는 것. 헬스장에서 PT를 받기로 했지만 2회 만에 헬스장은 폐쇄되었다.
코치도 필요 없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 쉽고 익숙한 ‘걷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6천 보, 7천 보 정도를 걷다가 3월 중순부터는 만 보를 걸었다. 그러기를 한 달, 만 보가 익숙해졌다. 다음엔 만 오천 보로 늘렸다. 만 오천 보가 또 한 달 반. 어느새 나는 잘 걷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마스크를 쓰고 밖에서 걸었지만, 도저히 덥고 답답해서 지속할 수가 없었다. 마스크 없이 걷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바로 실내에서 걷기다. 좁은 집이나 사무실에서 걷자니 제자리 걷기, 제자리 뛰기 같은 꼼수를 이용했다. 정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대충 걸음 수나 채우자고 엉터리로 뛰던 것이 의외로 체력을 늘려 주었다. 10분에서 30분까지 뛰는 시간이 늘어났다. 급기야 밖에서 달리기까지 시도하게 되었다.
걷는 인간에서 달리는 인간으로 진화하기, 진행 중이다.
과연 달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