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작은) 오름을 못 가는 이유

벌레, 풀, 뱀이 무셔워요!

by 소율

벌써 도민생활 만 8개월. 언제 시간이 갔을까? 지도에서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제주도를 세로로 딱 갈라 보자. 그동안 절반 오른쪽 지역에 속하는 유명한 숲길과 오름을 대충 가보았다. 물보다 땅에 익숙한 나로선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열심히 걸었다.


따라비 오름, 다랑쉬 오름, 백약이 오름, 아부 오름, 붉은오름, 성산 일출봉, 지미봉, 말찻 오름, 큰사슴이 오름, 이승이 오름, 사려니 오름, 거문 오름, 물영아리 오름, 절물 오름, 큰지그리 오름 등. 이중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오름은 계절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 편리한 주차장과 비교적 넓은 길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맞이 숲길, 삼다수 숲길, 사려니숲길, 장생의 숲길, 숫모르 숲길, 쫄븐갑마장길, 머체왓 숲길, 소롱콧길, 천아숲길 등은 혼자 걸었다. 그 외에 환경단체 <곶자왈사람들>의 '숲길 걷기 모임'에 참여해 여럿이 걸은 숲길도 적지 않다. 무릉 곶자왈, 신례천 숲길, 서영아리 숲길, 서중천 숲길, 저지곶자왈, 도순천숲길, 물보라길 등.



장마철엔 숲길보다 오름이 나았다. 숲길은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너무나 습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아직 탐험하지 않은 (동쪽의) 작은 오름들이 궁금했다. 오름 안내서 <오름오름 트레킹맵>과 제주도민들의 블로그를 참조해 목록을 만들었다.


거슨세미 오름, 안돌 오름, 밧돌 오름, 동거문이 오름, 돝오름, 둔지 오름, 아끈다랑쉬 오름, 좌보미 오름, 높은 오름, 손지 오름, 영주산, 모구리 오름 등.


어쩌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작은 오름을 찾아갔다. 흐려도 햇빛이 내리쬐어도 오름에선 바람을 맞을 수 있어 견딜 만했다. 차라리 장마철엔 땀에 젖더라도 걸을 순 있었다. 올해 제주는 비가 거의 없는 마른장마였다. 물론 찜통 같은 더위와 습기는 감수해야 했지만. 썩 쾌적한 상황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한여름이 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다. 원하는 오름에 가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사실 작은 오름들은 입구를 찾는 것 자체부터 만만치 않다. 내비에 오름을 치면 입구가 아닌 엉뚱한 방향을 안내하기 일쑤. 내비마다 도착지가 다르기도 하다.


한두 번은 허탕을 치고서야 겨우 입구에 도착한다. 경차가 아니라면 지나가지 못할 좁은 길을 통과하는 경우도 많다. 내 차가 모닝인 게 어찌나 다행이지. 그러나 주차장은 기대하지 말 것. 주변에 공터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길가에 세워야 한다. 사유지인 곳도 있으니 각별한 주의 요망.


겨우 출발점에 섰는데 장애물이 차례로 가로막는다. 첫째는 벌레. 진드기는 물론 모기가 등쌀이다. 긴팔 긴바지는 기본, 그래도 물린다. 둘째는 억세고 무섭기까지 한 풀! 장마철을 지나자 허리까지 자라 좁은 길을 완전히 뒤덮었다. 거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의 흔적을 따라 걸을 수는 있지만 매우 힘들다. 잘못하면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제일 겁나는 셋째. 풀밭에 파묻힌 발 주위에 뭐가 있을지 도무지 예상이 안 된다. 뱀에게라도 물리면 대책이 없다. 119를 부른 들 나를 찾아올 수나 있을까? 나조차 내 위치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오름 목록 중 굵게 표시한 것들이 아직 내가 밟지 못한 오름이다. 얼마 전 아끈다랑쉬 오름과 좌보미 오름에 갔다가 오르길 포기했다.



아끈다랑쉬는 연예인 언니 옆에 선 일반인 동생 같달까.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아래 붙은 작은놈이니까. 높이가 아주 낮다고 해서 우습게 보았다만. 오르막이 가파른 데다 아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까지 6, 7분이면 오른다는데 도대체 어디에 발을 딛어야 할지. 낙상하기 딱 좋았다. 깔끔하게 오르막 초입에서 돌아섰다지.




좌보미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매력적인 녀석이다. 전부터 무척 가보고 싶었다. 여느 작은 오름들처럼 입구를 힘들게 찾았다. 그러나 나는 봉우리 하나를 넘자마자 바로 내려왔다. 그 봉우리를 넘는 동안에도 중간에 되돌아갈까 여러 번 고민했다. 다리에 감겨드는 빽빽한 풀이 진짜 두려웠다. 마치 야생의 정글에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이구 무셔라. 간신히 봉우리에서 내려와 한숨을 내쉬었다.


7, 8월은 아니야. 최소한 9월은 되어야 해. 작렬하는 태양이 뜨겁기도 뜨겁지만 그것보다 조난당하면 우째요? 혼자 하는 제주살이.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대부분 홀로일 수밖에 없다. 단체에서 진행하는 모임만 바라보기엔 시간이 아깝다. 아무튼 내겐 제주의 여름 나기가 간단치 않다. 걷기 힘든 8월이 계륵이로세. 한여름엔 역시 바다가 답인가? 부지런히 튜브나 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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