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쓰기'라는 당근

이거슨 탐험이다

by 소율

<2022. 12. 27>


두 달을 별러온 대공원 걷기. 그게 별것 아닌 별것인 것이, 제주에서 돌아온 이후 도통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물론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버선발로 달려간다만. (사람들의 추측과 달리) 나름 힘들었던 섬 생활에서 벗어나자 좀 쉬고 싶었고. 원래 겨울엔 집 밖에 잘 안 나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이번 겨울은 유독 한파의 나날들이 아닌가 말이다.


나가지 않을 이유가 넘치니 나로선 조금 떳떳하달까. 대신 집에서 '드걷'을 주로 한다. 드걷이란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제자리 걷기 하는 걸 뜻한다. 재밌는 드라마 한 편을 즐기면서 걸음 수도 채우고, 나쁘지 않다.


다만 요즘 두통이 수시로 찾아와 성가시기 짝이 없다. 노트북을 펴고 일 좀 할라치면 안경다리가 닿는 귓바퀴 부분에서부터 머리통 전체에 통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전부는 아닐지라도 아마 하나 정도는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쐬지 않아서'가 해당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쉬이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귀차니즘의 힘은 강대하고도 강대하도다. 그런데 마음 한 자락을 바꾸니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렇게 걷기로 일기를 쓰자는 것. 매일 걷고 그에 대해 글을 쓰자,라고 목표를 정했다. 그랬더니 막 나가고 싶어지는 것이여. 동기 부여가 제대로 먹혔다.


점심식사 후 기온이 영상으로 올랐다. 이때다 싶어 걸을 준비를 했다. 기모 청바지에 얇은 폴라티와 벙벙한 진분홍 패딩(세화오일장에서 산 것)을 입었다. 도톰한 장갑을 끼고 작은 크로스백을 매었다. 신발은 평소대로 트래킹화.


우와, 햇살이 눈부시다! 바람은 초속 0미터?! 제주에선 초속 10미터 내외가 겨울바람의 디폴트 값이다. 나는 이른바 '미친 바람'이라 칭한다. 세기도 세기지만 방향이 360도로 회전하며 불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없는 제주 공기란 있을 수 없는 일. (맨날 제주에선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는 게 근래 생긴 버릇이다)



아 좋다. 나는 청계산 등산로 입구의 공영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 위에 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우리 동네 문원동(일명 문원 2단지)에서 서울대공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산길을 10분 정도 넘어가면 공원이다.


계단은 햇빛에 말라 건조하다. 뭐야 그동안 괜히 겁먹었잖아?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쌓인 오솔길이 나타난다. 눈길은 사뭇 미끄럽다. 스틱을 챙겨 왔어야 했나? 등산화를 신을 걸 그랬나?


서울대공원으로 가는 내리막길은 이미 사람들이 많이 밟아서 매끈거린다. 나는 넘어질 걸 대비해 단단히 장갑을 끼고 두 팔을 15도쯤 벌려 엉거주춤 내려간다. 다져진 등산로 말고 아직 눈이 쌓인 곳을 디딘다. 그쪽은 폭삭 소리를 내며 발이 눈 속에 묻혀 미끄럽지 않으니까.


그러면서 자꾸 걸음을 멈춘다. 메모하느라 사진 찍느라. 벌써 등이 따땃하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걷는다. 돌아갈 길이 벌써 걱정이네.




드디어 대공원 뒷길. 잘 깔린 까만색 도로에 발이 닿는다. 한결 걸음이 가볍다. 도처에서 까마귀, 까치, 비둘기가 운다. 다들 기운이 넘치는군. 참 오랜만이다. 거의 두 달 만인가. 호수 옆 작은 다리를 건넌다. 호수는 얼고 그 위로 하얗게 눈이 쌓였다.


동물원 정문 옆을 지날 때 눈밭에 까치가 종종거린다. 뭔가를 콕콕 쪼아 먹는다. 눈 속에 먹을 게 있나?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역시 대공원 까치 클라스! 도통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나는 길을 건너 장미원 쪽으로 걷는다. 멀리서도 확연히 붉은색, 분홍색 꽃들. 겨울에 꽃이 피어있을 리가 없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핀다. 수국이다. 뭔가 어색한 색깔. 설마 물감을 뿌렸나? 나는 이상해서 꽃잎을 뒤집는다. 뒷면은 누런색. 제철이 지나 자연스레 바래지는 그 색이다.


바로 옆에 색깔 없이 누런 한 무더기의 수국이 서있다. 그 아이들이 내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 누가 도대체? 수국의 본래 색깔이 얼마나 이쁜데, 뭐 하러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그때 지나가던 세 명의 나이 지긋한 언니들이 말씀하신다.


"저거 색이 왜 저래?"

"뭘 칠했나 보지."


난 꽃잎을 뒤집어 보고서야 진상을 파악했다. 제주에서 수국을 그리 많이 보았는데도 말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수준이랄까. 언니들은 멀리서 보고도 단박에 짚어냈다. 저런 게 연륜인가. 즉 언뜻 보고 똥과 된장을 구분하는 능력.


하늘이 파랗고 햇빛이 찬란한 게 마치 봄날 같다. 그 아래 연두색 줄무늬 지붕을 단 리프트가 느리게 흘러간다. 좀 기대 이상인걸?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대략 70대. 거의 등산복을 입었는데 그들은 소리 내어 웃거나 아니면 표정이 밝다. 공원엔 차분한 활기가 넘친다. 서울랜드 안, 오르내리는 바이킹에서 젊은 애들이 지르는 즐거운 비명. 눈썰매장에서 울리는 직원의 경쾌한 마이크 소리. 나이 듦과 젊음, 그 두 가지가 드물게 조화롭게 어울린다.


나는 처음 온 것처럼 대공원 곳곳을 관찰한다. 일부러가 아니라 저절로 그리된다. 너무 오랜만이라 모든 것이 새롭다. 나에게 오늘의 걷기는 걷기가 아니라 탐험이다. 나는 계속해서 장갑을 벗었다 끼었다 반복한다. 자꾸 사진을 찍고 싶은 장면이 나오고 메모할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호수를 끼고 한 바퀴를 돌았다. 고고스 카페 앞. 그 뒤가 문원동으로 이어지는 뒷길이다. 어느새 장갑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에 열이 난다. 막판 '난 코스' 등장. 바로 아까 내려왔던 산길이다.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등산로로 들어서니 찬바람에 콧물이 훌쩍. 혹시 미끄러질까 봐 장갑을 다시 끼고 오른다. 어라 내려갈 때보다 오르는 게 훨씬 쉽다! 동네로 나가는 갈림길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참았던 코를 팽팽 푼다, 시원하다.


콧구멍 안쪽까지 꼼꼼히 닦고 한숨을 돌린다. 두 달 동안 밖에서 걷지 않은 여파로 겨우 이 오솔길조차 힘이 든다. 안 되겠어, 열심히는 아니어도 여덟심히나 일곱심히 정도는 걸어야겠네.


눈 속에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사뿐히 걸어간다. 이 추운 겨울을 산에서 어찌 버틸까. 며칠 전 유튜브에서 까만 아기 고양이를 보았다. 어찌나 귀엽던지 나도 꼭 저렇게 온통 까만 고양이를 아기 적부터 키우고 싶어졌다. 남편이 동물이라면 결사반대라서 '언젠가'라고만 생각하지만.


아들의 애인이 고양이 한 마리와 개 한 마리를 키운다. 매일 그 녀석들 영상을 보내주면 나도 옆에서 같이 본다. 일종의 의무적인 시청이랄까. 크크크.


집에 돌아왔다. 간만의 걷기 아닌 탐험은 매우 뿌듯했다. 뿌듯함에 만족을 더하는 방법. 호호호, 어제 배송된 에티오피아 시다모 원두를 내려마시는 것이지. 재택근무하는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시다모 핸드드립 콜?"

"콜!"



드륵드륵 원두를 갈아 손으로 휘휘 내린다. 일 인분에 150ml만 뽑아서 온수를 추가하기, 그렇게 각자의 입맛에 맞추기. 코로나가 닥쳐 딱 세 번만 수업을 들은 바리스타 기초반에서 배웠다. 아들은 아주 진하게 마시는 편이고 나는 물을 더 붓는다.


캬, 탐험 후 커피 한 잔은 진리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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