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러닝머신 효과? 맷 데이먼 효과!

맷 데이먼과 같이 걸었다

by 소율


겨우내 걷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다. 핑계는 끝이 없었다. 마스크(특히 KF94)가 싫었고 추웠고 놀았고 아팠고 점을 뺐고 바빴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헬스장 등록이다. 근력 운동에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러닝머신 하나를 타기 위해서.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이유 없이 귀찮은 날에도 부담 없이 나설 수 있거든. 핑계를 대기엔 민망하게도 걸어서 5분 거리니까.


작년 제주도에서 일 년 살기를 했지만 올레길 완주, 오름 완주는 하지 않았다(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좋아하는 곳들만 여러 번 걸었다. 해외를 주로 다니는 여행작가지만 산티아고 순례길도 갈 생각이 없다. 하물며 순례길 완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완'자가 들어가는 행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종'자도 마찬가지).


하지만 일상 걷기라면 또 조금 해본 사람이다.

생활 속에서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걷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만 보 걷기' 같은 것. 코로나가 닥쳐서 하고 있던 일들이 모두 중단되었을 때 에라 하는 심정으로 만 보 걷기를 시작했다. 할 일이 없어 꾸준히 걸었더니 덜컥 체중계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걷기에 대해선 나름의 개똥철학이 있다.

오십 중반까지 운동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어도 걷기만큼은 완전히 손을 아니 발을 놓지 않았다. 들쭉날쭉하더라도 어쨌거나 평생을 '걷는 자'에 속해 있었다. 아래 글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한마디로 '너무 빠졌다.' 하루에 만 보는커녕 오천 보도 걷질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오후 2시, 기세 좋게 우리 동네 헬스장 문을 열어재꼈다. 몇 년 만에 본 헬스장은 리모델링을 했나 보다. 신발장도 라커도 광택이 나는 흰색으로 바뀌었다. 직원도 그때 그분이 아니었다.


러닝머신아, 반갑구나야!


거울에 비친 복장은 운동복 바지에 제주도 세화오일장에서 산 할머니용 티셔츠. 나란 여자, 해외건 국내건 시장에서 옷을 잘 사는 타입. 샛길로 잠깐 빠지자면 제주의 오일장에선 티셔츠보다 바지가 유용한 게 많았다. 헐렁이 꽃무늬 몸뻬부터 부츠컷 청바지, 배기 면바지, 도톰한 기모 바지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것이 모두 고무줄 허리! 나에겐 완벽했지.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 바지를 오일장에서 공수했다. 지금도 잘 입고 다닌다. 반면 티셔츠는 솔직히 살 게 없었다. 너무 할매스럽고 너무 크고 너무 알록달록하거나 번쩍거리거나. 막 눈이 부셔!



러닝머신 출발. 속도는 3. 5부터 시작해서 4. 5까지. 나도 안다, 아주 느리다.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무리하지 않는다'가 요즘 나의 모토다. 배에 힘을 주고 고개를 당겨 가볍게 걸었다. 창문 너머 밖이 훤히 보이는 구조, 시야가 시원하게 트였다.



오늘의 목표는 딱 4킬로미터. 차차 늘릴 생각이다. 머신에 달린 티브이가 새 거다. 좀 틀어볼까? 채널을 돌리다 '맷 데이먼'이 딱 걸렸다. 아니 저거슨 전설의 '본 아이덴티티!' 나는 '굿 윌 헌팅' 시절부터 맷 데이먼의 팬일세. 당신, 얼굴이 저렇게 갸름하고 날렵했던가요? 왤게 잘생겼죠? 하긴 그래서 내가 좋아했었지롱. 최근 푸짐한 인상의 아저씨 맷과는 180도 다른 모습에 걸을 맛이 났다. 어쩐지 맷과 함께 걷는 기분이 들었어, 주책스럽게.



젊은 맷 데이먼에게 반한 동안 벌써 4킬로미터를 걸어버렸다. 찌뿌둥한 몸과 기분까지 개운해졌다. 그대를 더 보고 싶으나 이만 가야겠소. 러닝머신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사실 러닝머신에 달린 티브이, 그것도 맷 데이먼 효과라고 해야겠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 힘들게 뺀 점 자리에 다시 멜라닌 색소가 붙으면 안 되므로 당분간 햇빛을 멀리해야 한다.



러닝머신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여행작가 소율과 함께 운동하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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