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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Dec 29. 2023

나하 시민들은 어디서 생활을 할까?

<오키나와 여행 2023. 12. 10 ~ 13>


본격적으로 국제 거리 주변을 탐사할 시간이다. 옆에 붙은 시장과 도자기 거리를 가보기로 했다. 나하 시내에서 노닥거리기가 이번 여행의 테마. 실제론 느리게 걷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안 하기. 오키나와에 오면 흔히 렌터카를 타고 섬의 북부에서 남부까지 해변과 섬을 찍는다. 흩어져 있는 유명 맛집들을 들리는 것도 필수.


하지만 나는 렌터카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다. 가끔 렌터카 여행을 할 때마다 얼른 차에서 내리고만 싶었다. 독일에서도 알래스카에서도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몹시 답답했다. 렌터카 여행의 속성은 목적지까지 힘껏 달려 잠깐 구경하고 또 달리고의 반복이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가능한 많은 곳을 가고 싶어 했고 멈추는 시간보다 달리는 시간에 집중했다. 주객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나는 반쪽짜리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혼자 하는 오키나와 여행에서 내가 렌트를 할 리가 있나. 남들이 다 간다는 루트나 맛집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계획 없이 골목골목을 걷고 아무 가게나 구경하고. 마주치는 카페나 식당에서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그러다 또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면 행운이고. 그저 잠들었던 여행 세포를 깨우는 것이 목적이다. 나하에서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여행 인생 16년 동안 그게 불가능한 도시는 단 한곳도 없었으니까.


나는 다시 국제 거리로 돌아갔다. 실은 동네 탐방보다 숙제 하나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핸드폰과 보조 배터리를 꼽을 플러그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쓸데없이 돼지코만 세 개나 챙겨왔다. 충전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이런 천하의 허당이 있나.


플러그를 어디서 팔까? 네이버의 오키나와 여행 카페를 검색했다. 다이소나 돈키호테에 가면 된단다.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다이소 매장.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플러그는 없고 손님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이어서 국제거리 한복판의 돈키호테를 찾아갔다. 음악이 쿵짝쿵짝 사람들도 북적북적, 관광객이라면 한 번 이상 들른다는 돈키호테엔  (화개장터처럼)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플러그를 발견하고 만세를 부르다 2만 원 가격표에 쪼그라들었다. 엔저라 물가가 저렴하다더니 공산품은 아닌가벼. 어쨌거나 핸드폰 충전 걱정을 덜었다. 고봉밥을 먹은 것처럼 든든했다.


국제 거리 중간에 시장 입구가 있다. 어제도 잠깐 지나치다 보았는데 오늘은 제대로 구경을 해보자. 오키나와 특산품인 포도송이 해초를 파는 가게가 먼저 보였다. 어젯밤 타파스 식당에서 샐러드 위에 얹어주었던 그것이다. 맛은 음, 아무 맛도 없다. 그냥 씹히는 맛. 알록달록한 꽃무늬 셔츠를 파는 가게도 나타났다. 나는 웬만하면 반팔을 한 장 사서 갈아입고 싶었다. 아침에 긴팔을 입은 건 큰 실수였다. 이 동네에서 파는 옷들은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오리온 맥주 글씨가 새겨지거나. 급한 마음에 하루만 입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게 뻔했다.


시장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지저분하고 어두웠다. 구불구불한 골목이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관광지 시장치고 아니 그냥 시장치고도 너무 정비를 안 했다. 일본 하면 '청결'이 떠오르는데 나하는 정말 이미지와 다르다. 나 어릴 적 고향 충주의 시장에 와있는 것 같았다. 자그마치 40여 년 전의 한국 시장과 현재의 일본 시장이 같은 모습이라?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입구에만 있을 뿐 깊이 들어가진 않았다. 안쪽일수록 문을 닫은 가게가 많았다. 혹시 저녁에 여나? 해가 진 후에 가는 건 더욱 내키지 않았다. 낮에도 으스스한데 밤에는? 오우 노우.   


오키나와는 대외적으로 아름다운 휴양지지만 실제 역사는 암울했다. 류큐 왕국이었다가 일본의 속국이 되어 수탈당했다. 이후 일본에 강제로 편입되어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상륙하여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에게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미군정이 통치하면서 또 억압당했다. 이후 본토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미군 기지는 끝나지 않는 문제로 남았다.


국제 거리는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았다. 화려한 거리 일대만 벗어나면 가게 하나 식당 하나 없는 텅 빈 골목들이었다. 온통 회색의 우중충한 도시는 고통스러운 역사 때문일까. 아님 나의 편견일까. 거리들은 한적해도 지나치게 한적했다. 낡고 칙칙한 건물들뿐, 도대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일상의 흔적을 엿볼 수가 없었다. 현지인들은 모두 어디에서 생활을 하는 걸까? 일본의 소도시가 대체로 이런 분위기인지 나하 시만 이런 건지 모르겠다.


시장에서 영문모를 1패를 당하고 도자기 거리로 향했다. 구름이 끼었다가 햇빛이 났다. 나는 땀에 젖어 걸었다. 한여름의 동남아도 아니고 한겨울의 오키나와에서 더워야겠냐고요. 앗 저건 도자기 파는 가게? 다 왔나 보다. 그런데 길가의 카페가 먼저 눈에 쏙 박혔다. 구글 씨에게 물어보지 않고 저절로 찾은 귀한 카페로다!


나는 진한 망고 주스로 원기를 회복했다. 에어컨이 나와 한숨 돌렸다. 옆자리엔 여행객으로 보이는 일본 여성이 앉았다. 그녀는 크림과 과일을 곁들인 카스텔라 세트를 주문하곤 사진을 찍었다. 두 여행자만 조용히 머무는 공간, 아무도 줄을 서지 않는 곳. 이제야 느긋하고 편안했다. 이게 여행의 맛이지.


도자기 거리엔 도자기 박물관도 있다는군. 아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아쉬웠다. 기운을 내어 거리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사람이 없기는 매한가지. 관광객 몇몇이 나처럼 기웃거릴 뿐. 한 가게로 들어가 도자기를 구경했다. 머그나 작은 잔, 접시 등은 의외로 색깔이 어둡고 소박했다. 과연 저걸 사는 여행자가 있을까? 장사가 될까?


나는 올여름 생일 선물로 폴란드 도자기를 선택했다. 결혼 28년 만에 그릇을 전부 개비한 것이다. 2011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처음 폴란드 도자기를 보고 반해버렸다. 청량한 파란색과 특유의 무늬가 얼마나 이쁘던지. 당장 사고 싶었지만 배낭에 넣어올 순 없는 일. 그 후 집안의 그릇들을 몽땅 폴란드 도자기로 바꾸는 소망을 품었다. 하지만 폴란드 그릇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한국 수입이 많아졌고 가격도 내려갔다. 나는 오랫동안 썼던 뒤죽박죽 잡종 그릇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종지 하나까지 어여쁜 폴란드 그릇으로 바꾸었다. 세트로 산 게 아니라 하나하나 직접 골랐다. 알록달록한 그릇을 꺼낼 때마다 흐뭇하다.



도자기 골목은 깔끔해서 산책하기가 좋았다. 아까 시장에 비하면 걸을 맛이 났다. 다만 심심했다. 밋밋하고 싱거운 느낌. 아 이게 일본 여행의 맛인가 봐. 긴 팔이 자꾸 걸리적거렸다. 내 반드시, 반팔을 하나 사고 말리라. 이러나저러나 국제 거리로 돌아가야 하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입을 만한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옷 가게마다 들렀지만 참 고를 게 없다. 숙소 근처에서 글씨 없는 하얀 티셔츠 발견! 원색으로 오키나와의 상징들을 동글동글하게 그려놓았다. 이건 괜찮군. 가격도 이만 원. 이틀 동안 국제 거리를 몇 번이나 왕복하는지 모르겠다. 지겨울 지경이다. 내일은 절대 국제 거리로 나가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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