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 Feb 13. 2024

프롤로그: 니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을 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들이 진지한 얼굴로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순간을. 열렬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몇 시간씩 통화를 하고 일주일의 반은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살았으며 주말마다 둘이서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바보라도 모를 수가 없다.


그래도 그렇지, 결혼이라고!!! 사귄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혼을 한다고??? 아니 니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을 해??? 온갖 염려가 앞섰다. 아들은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나이가 어렸다. 3년 전 겨울,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 해가 바뀌어도 겨우 스물일곱. 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너무 성급하지 않냐,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봐라. 그러나 엄마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에겐 아니 이 커플에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1년 기한으로 한국에 일하러 온 영어유치원 교사였다. 한국에 오자마자 둘이 가까워진 계기는 같은 알래스카 대학 동창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알래스카 주립대학을 나왔다.    


학교를 다닐 때부터 친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낯선 타국에서 홀로 생활하려던 차에 마침 의지할 친구가 곁에 있었고 급속도로 연인으로 발전했다. 어느새 1년이 지났고 그녀가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의 열악한 근무환경에 지친 그녀는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할 뜻이 없었다. 


롱디 커플이 되느냐, 헤어지느냐. 둘 다 싫었던 그들은 제3의 선택지를 찾았다.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대범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판단은 위험했다, 상당히 위험했다. 결혼이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란다. 연애 3년, 결혼 생활 20여 년. 도합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지만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이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순 없었다. 


만날 때마다 아침 드라마를 찍는 시부모님에게 15년 간 시달렸다. 남편은 언제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부모 편에 섰다. 그는 유교 보이의 표본이었다. 시집이라는 진창에서 한 발을 뺀 건 세계여행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이후 유방암 환자가 되고 나서야 나머지 한 발을 마저 뺄 수 있었다. 며느리 자리에서 빠져나온 지 10년이 좀 넘었다. 이혼을 결심할 때마다 큰일이 생겼고 어영부영 여전히 남편과 살고 있다. 지금은 그저 사이가 나쁘지 않은 룸메이트 관계를 지향한다.  


나는 아들이 결혼을 안 해도 괜찮다는 주의였다. 솔직히 별로 권하고 싶진 않았다. 다분히 엄마의 삶이 반영된 의견이다. 어쨌든 결혼을 고려한다면 동거를 해보거나 6개월 이상 장기여행을 가보길 설파했다. 연애로 십 년을 만난들 부대끼고 살아보는 한 달만 못하다. 의외로 서로의 장점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의 단점이나 내가 싫어하는 부분을 평생(!) 감당할 수 있느냐. 그게 원만한 결혼생활의 기준점이 된다고 본다.      


아들이 선택한 사람이 외국인인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십 대 때 이미 엄마와 함께 세계여행을 했고 미국 대학을 다녔고 이젠 여행한 나라 수가 나보다 많고 심지어 군대에서마저 파병을 갔다 왔다. 그 후 독일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그동안 사귀었던 여친의 국적 또한 다양했다. 아제르바이잔, 중국, 캐나다, 한국. 국제결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었다. 


나는 다만 아들이 시간에 쫓겨 잘못된 판단을 했을까 봐 두려웠다. 자기 자신과 연인에 대해서 말이다. 결혼이란 로또와 비슷하다. 아무리 확신을 했어도 결국 까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스물여섯에 중대사를 결정하는 건 거의 도박 아니냐? 너의 미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대학원을 가겠다며? 직장생활도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잖니? 앞날이 구만리인데 벌써 발목을 잡히겠다고? 걱정이 난무했다. 정말이지 뜯어말리고 싶었다.  

 "엄마, 나는 지금처럼 나랑 잘 맞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내 인생에서 다른 여자는 소용없어요.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엄마도 만나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나를 믿어줘." 


자신만만했다. 아 내가 지나치게 자신감(아니 자만심?)을 키워주었나 보다. 고등학교 대신 세계여행을 떠날 때부터 시작해서 홈스쿨링, 대학, 군대, 인턴, 직장까지 하나하나 스스로 찾아내고 선택한 아이였다. 인정한다. 자만심인지 자신감인지 자존감인지, 하여튼 폭발할 만하다. 하지만 그 나이엔 다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지. 나도 그랬다. 살아보니 퍽이나. 


아들은 일 년의 절반을 여친 집에서 지냈다며, 엄마 말처럼 동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즉 그녀를 겪을 만큼 겪어보았다는 얘기다. 무슨 말을 해도 내 눈에 그저 애인과 죽도록 헤어지기 싫은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니가 인생을 뭘 알아?!' 외치려다가 참았다. 엄마를 꼰대 취급이나 하겠지. 할 말은 많은데 할 수가 없었다. 반대하면 오히려 더욱 불타오를까 봐. 그리고 평생 돈독했던 모자 사이가 틀어질까 봐. 말린다고 말려질 일일까 싶기도 했고요.


아들은 만만한 엄마에게 먼저 통보를 했다. 아무래도 아빠보단 저를 쉽게 이해해 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그다음 아빠는 엄마가 맡아줄 것이다. 아들 넘의 그림이 빤히 보였다. 나름 영리한 전략을 썼다고나 할까. 나와 달리 남편은 결혼하려는 여자가 외국인이라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예상했다, 유교 보이에게서 나올 법한 반응이었으니까.     


어차피 아들은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성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데 부모의 반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모 역시 타인에 불과한 것을. 아들의 앞날이 아무리 걱정스러운들 그건 아들이 감당할 몫이다. 부모에겐 오직 축복할 권리만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간혹 있기는 하다만 끝이 좋지 않더라. 


나는 고민, 걱정, 두려움, 불안을 거쳐 곧 수긍과 적응의 단계에 이르렀다. 아들의 예측대로 어렵지 않게 마음을 바꿔먹었다. 자식과 척 지고 살 게 아닌 다음에야 당연한 수순이리라. 기왕이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았다(이 놈이 엄마를 너무 잘 알아). 남편은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왔다. 역시 아들의 기대대로 중간에서 내가 설득을 했다. 속으론 썩 달갑지 않아 하지만 어쩌겠냐고요(아빠도 잘 안다, 영악한 놈).     


산 넘어 산이라더니 실은 마음의 숙제가 하나 더 남았다. 그건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자. 어쨌든 아들의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알래스카로 떠나기 전에.   



       

대문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연재 브런치북>

화요일: 얼떨결에 시엄마

토요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