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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r 12. 2024

예비 며느리와 동거하기 2편

셋이 지내는 게 익숙해졌을 무렵, 아들이 슬쩍 그런다.


"엄마, 얘가 집밥이 먹고 싶대. 국도 엄청 좋아하거든."


즉 밥과 국으로 이루어진 홈메이드 가정식을 해달라는 야그지. 매일 사 먹는 식당 밥이 질렸나 보다. 나라고 왜 정갈한 한국식 밥을 먹이고 싶지 않았겠냐만. 사정이 복잡했다.


각 잡고 요리를 하기엔 집안 꼴이 받쳐주질 않았다. 제주도에서 컴 백 홈을 했건만 절반은 남의 집 같았다. 내 물건은 아직 박스에 갇혀있고요, 내 방에 들어갈 수조차 없고요, 주부 없이 남자 둘이 쓰던 부엌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고요. 구석구석 손댈 데가 천지였다. 그러나 손님 앞에서 더러운 집안을 뒤집을 수는없잖은가.   


무엇보다 나의 네 번째 책 <그래서, 베트남>이 마침내 출간되었다.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제주에서 서둘러 돌아왔다. 실컷 작업을 해 놓고 인쇄만 남았을 때 2020 코로나가 터졌다. 여행은커녕 가족과도 거리 두기를 하던 시절에 여행 에세이를 펴낼 리가 있나. 출간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하필 내가 제주살이를 하던 2022년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만들다 만 책을 다시 완성해 보자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산고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책이 탄생한, 아니 부활한 것이다. 출판사에 불려 다니고 이런저런 뒤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반찬이 중요하겠수?


물론 나도 귀한 손님에게 손수 만든 집밥을 먹이고 싶다만. 집은 난장판에다 마음도 분주한 가운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가 뭐 밤낮없이 쓸고 닦는 스타일은 아니다. 다만 어질러진 꼬락서니를 못 참는다. 즉 정리에만 신경을 쓰는 편. 먼지가 조금 있는 건 괜찮은데 물건이 지 맘대로 돌아다니는 건 못 본다.          


제주로부터 일인용 이사를 하고도 무려 한 달을 무질서한 집에서 버텼다고요! 너무 힘들었다. 특히 내 방. 당분간 내 방이 아니게 된 그 안방. 두 사람이 갈아입은 옷이며 빨래 등이 침대 위에 쌓였다. 바닥엔 펼쳐진 캐리어와 가방, 소지품이 나뒹굴었다. 공간이 없는 걸 이해하지만.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폭탄 맞은 방이 문 틈으로 보일 때마다 차라리 내가 정리를 해줄까 싶었다. 하지만 손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는 일. 잘못하면 뒤지는 셈이 될까 봐 치우기가 무서웠다. '저거슨 방이 아니다, 아니다' 주문을 외었다.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다. 가끔 티 나지 않게 청소기로 바닥만 밀었다. "느이들, 결혼해서도 이런 돼지울간에서 살 거니? 설마 아니겠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가정식 요리를 부탁받았다. 엄마가 되어 노오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된장국을 끓이고 두부를 지졌다. 반찬 가게에서 나물 두어 가지를 사 와 구색을 맞추었다. 미안하다. 다음엔 소고기뭇국에 갈비찜과 잡채를 해줄게. 고등어도 굽고 갈치도 조려줄게.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주마.


그녀는 된장국을 아주 좋아했다. 두부도 맛있게 먹었다. 유치원에서 근무할 때 아이들이 먹는 밥을 그대로 교사들에게도 주었단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원장이 아닌가. 아낄 걸 아껴야지. 유아용으로 만든 반찬이 어른에게 더구나 외국인 입맛에 맞을 리가 있을까.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보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남편이 한정식을 예약했다.


한식은 물론이고 회와 얇게 썬 스테이크까지 나오는 퓨전 식당이었다. 알래스카에선 연어가 흔하니까 생선은 익숙하단다. 연어를 회로 먹진 않고 보통 구워서 먹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광어, 우럭 회를 잘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제일 맛있는 게 뭐였냐고 남편이 물었다. 마지막에 나온 스테이크란다. 온갖 걸 먹었는데 결국 소고기라니.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역시 서양 사람에겐 고기가 최고구만!


그녀가 돌아가기 전 가장 중요한 행사가 남았다. 바로 약혼 사진 찍기! 그녀는 한국 친구의 결혼식이 30분 만에 끝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다른 결혼식이 뒤를 이어 계속되는 것에 더 놀랐다. 공장에서 결혼식을 찍어내는 것 같다고 했다. 과도한 빨리빨리 문화는 나도 가끔 당황스러운데 그녀에게는 문화충격이었을 것이다.    


반면 야외에서 찍은 신랑신부의 사진은 부러웠다. 한국에 온 김에 멋진 커플 사진을 꼭 찍고 싶어 했다. 아들이 미리 예약을 잡았놓았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 스튜디오로 갔다. 메이크업받고 한복으로 갈아입고 촬영장인 수원까지 갔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들은 종일 미소 짓느라 턱이 빠질 것 같았다네. 예비 신랑 신부가 미남미녀라고 엄청 부러움을 샀단다. 원래 한복만 예약했는데 덤으로 드레스 한 벌을 더 빌려주었다고. 드레스 입은 모습도 아름답지만 미국인 아가씨에게 한복이 요로코롬 어여쁘게 어울릴 줄은 몰랐다. 음전하고 우아하다. 조선 왕조 공주님 포스일세.



한 달 동안 정이 듬뿍 들었다. 처음에 카페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친해졌다.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쉬운 한편 후련했다.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더니, 그 심정이 뭔지 알겠다.     

 

이삿짐도 못 푼 집에서 복닥거렸던 시간 덕분에 그녀는 나를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엄마가 알래스카에 놀러 오면 여기도 데려간다, 저기도 데려간다, 리스트가 늘어섰다. 지금 아들 부부(작년에 결혼함)는 오두막 같은 작은 집에서 산다. 올해엔 큰 집으로 옮길 예정이다. 그땐 꼭 오시라고 자꾸 이야기한다. 


그런데 K-시엄마와의 동거, 정말 괜찮겠니? 캬캬캬. 




대문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연재 브런치북>

화요일: 얼떨결에 시엄마

토요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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