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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Feb 20. 2024

아들의 아내가 될 사람

마음에 들었다

날벼락같은 결혼 선언 이후 겨우 마음을 진정했다. 때가 되었다 싶었는지 아들은 여친을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그래, 아들의 아내가 될 사람인데 얼굴을 봐야지. 추위가 서서히 물러가는 2월이었다. 


첫 만남이니 가볍게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겨우내 한 몸이었던 패당을 벗었다. 코트를 차려입고 색깔 맞춰 스카프를 둘렀다. 내가 벌써 시어머니 입장이 된다는 게 영 낯설었다. 며느리 자리만큼은 아니겠지만 시어머니 자리 역시 편하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엄마 커플과 아들 커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아들과 나란히 걸어오는 그녀. 키가 훤칠한 미인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 여주인공을 현실에서 보는 느낌이랄까. 아들아, 이렇게 예쁘단 말은 안 했잖니? 우리는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지만 앞으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을 터였다. 나는 궁금한 것들을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부모님과의 관계나 알래스카 생활에 대해서, 결혼 후 커리어 계획에 대해서 등등. 나도 영어가 서툴고 남편은 나보다 더한 상태. 아들은 영어와 한국말로 통역하느라 바빴다. 일종의 동시통역사였다.  


흔히 미국인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 동작이 크고 말이 많고 지나치게 활달할 거라는. 그녀는 고정된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줄곧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했다. 상대의 부모가 놀랄 만한 상황이라는 걸 충분히 이해한 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외국 여자가 하나뿐인 아들을 채어간다고 여길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혹시 자신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둘이 사랑하며 살면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진심이었다. 바라긴 바라겠어요. 그녀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한 손을 아들이 꼭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들은 안심시키듯 가끔씩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거나 두드렸다. 녀석 눈에서 꿀이 그냥 뚝뚝 떨어진다. 아, 이젠 내 아들이 아니라 그녀의 남자로구나. 니가 남자가 되었구나. 왜 이른 결혼을 결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이 놈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고. 돌연 그녀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 너무나 다정하고 스위트하다, 이런 사랑을 받는다는 게 매 순간 감동스럽다, 멋진 남자를 나에게 보내주어서 정말로 감사하다. 그러자 아들의 눈도 하트가 되었다. 하트 두 쌍에서 꿀이 흘러넘친다. 이러다 양봉장 차리겄다. 


대화는 점점 재밌어졌다. 입도 마음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내친김에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려고 했으나. 남편이 다음에 하자며 슬그머니 미룬다. 다음에 언제? 이보시오, 자주 만나기 힘든 거 몰라요? 아차 내가 깜빡했다, 유교 보이의 심리를. 그에겐 템포가 빨랐나 보다. 좋다, 여기까지 합시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직접 만나고 나니 훨씬 안심이 되었다. 


나중에 아들이 그녀의 소감을 전해주었다. 떠나기 전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어 기쁘고 고마웠다고. 엄마가 계속 미소 띤 얼굴로 대해 주어서 편안했다고. 그러자 남편이 불쑥 "그럼 나는?" 하고 묻는다. 아이고 이 사람아, 지금 질투합니까?! 외국인 예비 며느리가 어색하면서도 한편 잘 보이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


그러나 이 커플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국제결혼이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그녀는 취업 기간이 만료되었으므로 일단 집(알래스카 페어뱅크스)으로 돌아간다. 가서 약혼자 초청 비자를 신청한다. 그게 나오면 아들이 가서 혼인 신고와 간소한 결혼식을 한다. 영주권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전에 여행허가증을 받아 한국에 온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한 후 페어뱅크스로 컴백한다.   


요점은 아들이 그녀를 따라 알래스카에서 살겠다는 것이다. 알래스카로 대학을 보낼 때만 해도 알래스카 여자와 결혼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참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도다. 엄마 마음이야 물론 한국에서 신혼을 시작하면 좋겠다. 아니 가까운 나라에서 살기만 해도 좋겠다. 


한국에서 알래스카를 가려면 (반대로 오려면) 비행기로 시애틀까지 10시간, 거기서 다시 앵커리지까지 3시간 30분. 경유시간까지 합쳐 도합 20시간 가까이 걸려야 도착한다. 일 년에 한 번이나 아들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에고.


그것 외에도 나에겐 숨은 고민이 있었다. 그녀의 엄마에 대해서 말이다. 전후 사정을 종합해 보건대 둘째 딸인 그녀에게 특히 애착이 강한 것 같았다. 미국에선 장서 갈등이 흔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무래도 한 도시에 사는 장모님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을 텐데. 괜히 장모님에게 휘둘리는 건 아닌지. 에고.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이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아들인데도 어째서 딸 같은 걱정이 드냔 말이다. 아들은 그럴 일 없다며 엄마의 염려를 일축했다. 배우자의 가족 관계는 겪어봐야 안단다. 누군들 미리 예상을 하겠니. 아빠보다 엄마를 닮은 아들 이어서일까, 자꾸 나의 경험을 투사하게 된다.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이 금방 떠날 수는 없었다. 결혼의 첫 단계인 약혼자 초청 비자를 받는 데만도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서류 처리가 느린 미국에서 911 테러와 코로나를 거치며 수속이 더욱 까다로워졌다. 아들에겐 속 타는 기다림의 나날이 이어졌다.  




대문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연재 브런치북>

화요일: 얼떨결에 시엄마

토요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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