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엄마! 엄마책 정말 재미있어. 내 이야기도 있어서 그런가 봐. 우리 담임선생님께도 한 권 드려도 돼?"
(엄마)"응, 아직은 조금 부끄러워. 엄마가 더 잘 쓰면 그때 드리자."
몇 년 전 40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각났고, 마침 그때 기회가 되어 글쓰기 수업에 참여했고, 그렇게 한 달 동안 써 내려간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하지만 책을 쓸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나는 내가 쓴 나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독자 1호인 아들은 부끄러워하는 엄마에게 말한다.
"나는 책을 쓴 엄마가 자랑스러워."
나의 부끄러움과는 대조적으로 아들은 내 책을 읽고 또 읽고 진심 자랑스러워하고 온 마음을 담아 응원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부끄러움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냥 내 이야기라 누구나 자기 이야기의 책은 낯뜨거우니깐 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실상 그 원인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나 스스로 그린 드높은 자아상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마음속 지하에 끄집어내지 못하게 시멘트까지 발라져 꽁꽁 숨어 있었다. 끄집어내면 더 이상 움켜쥘 수 없고,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해질까 봐 그랬을까?
법륜스님의 "행복"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 말이 나의 마음을 관통하고 그 꽁꽁 발라진 시멘트를 조금씩 깨뜨려 벗겨내고 그 민낯을 마주하게 할 화살이 된다.
"넘어지면 넘어지는 것이 나고, 성질내면 성질내는 것이 나입니다. 그런데 나는 쉽게 넘어지거나 성질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질내는 자기를 보는 것이 괴로운 거예요. 내가 생각으로 그려놓은 자아상을 움켜쥐고 고집하니까 현실의 내가 못마땅한 겁니다. 나는 잘났다는 허위의식이 꽉 차 있으니깐 현실의 자기가 부끄러운 거예요." [법륜스님의 행복 中]
몇 년 전 마음속 헛헛함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분명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었지만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누리지 못했고, 불안함과 허전한 마음으로 끌어안은 인간관계의 끝은 엉망이었다.
가슴에는 송송송 벌집모양의 구멍이 났고, 그 뚫린 구멍 사이로 차가운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이내 그 바람은 내 가슴에 공허함을 만들어냈다. 그 공허함은 한겨울 난방을 한 따뜻한 집의 구석에 앉아 어디선가 들어오는 차가운 외풍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그 자체였다.
늘 현실이 못마땅했던 나. 부끄러웠던 나. 그건 바로 내 생각대로 그려놓은 드높은 자아상 때문이었다. 내 마음속 지하에는 그렇게 행복을 빼앗아 가는 악마가 살고 있었다. 그 악마는 성취 뒤에 당연히 누려야 할 만족을 앗아갔고, 깊게 뿌리내려야 할 자존감의 성장을 방해했다. 그리고 겉보기에 행복하고 당당해 보였던 나의 깊숙한 내면에 꽁꽁 포장해 둔 남과 비교하며 못마땅해하는 내 모습을 깨워내고, 행복감을 느끼는 내 모습은 가둬 두었다.
그리고 그즈음, 40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당장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현실과 맞바꾼 미완성의 나의 꿈이 생각났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기록의 욕구, 그 내음은 벌집모양으로 뚫린 마음을 대신하고 싶어 했다. 그동안 흘려보낸 나의 일들, 나의 삶을 한 번은 정리하고 가야 다음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그 지점에서 앞으로 전진만 하던 나는 글을 쓰면서 멈춰 서게 되었고 내 삶의 내면과 나의 마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하면 멀리 간다"는 현인의 말이 내 뇌리를 스치며, 경제적 안정이라는 현실적인 가치아래 현재를 즐기는데 초점을 맞춘 감성과 행복, 자기만족의 가치가 휘리릭 스쳐 지나갔다.
"엄마, 나 좀봐, 내 얼굴 좀 봐"라는 아이의 말이 귓가에 들렸다.
내 눈은 정보를 주는 핸드폰에 꽂혀있음을 알았지만, 잠시 눈 맞춤을 하고 안아주고 또다시 나의 길을 갔던 모습. 함께였지만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한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가 생각났다. 경제적 안정이라는 현실적인 가치와 관계되지 않은 모든 것이 귀찮았고 그렇게 놓아버렸었다.
길을 걸을 때 눈은 강의에 막혀있었고, 운전을 할 때 귀는 오디오소리에 가려졌다. 그 시절 내가 속한 세상의 아름다움과 찰나의 행복을 귀와 눈이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성적 가치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행복한 시간에 있어서 나는 반은 눈뜬장님,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정해놓은 물질적 가치를 쫓아 나는 혼자 갔고, 다시 오지 않을 아이가 커가는 인생의 시간들은 나의 선택에 따라 단 몇 조각 정도 내 손에 쥐어졌다. 그 순간을 즐기면서 함께 갔다면 우리의 인생은, 나의 인생은 더 풍요로워졌을까?
중년이 된 나는 나아감이 아닌 멈춤을 통해 그때 상실한 그 상실감을 깨달으면서 인생의 숙제 같았던 가슴에 송송 뚫린 공허함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렇게 놓친 찰나의 해맑고 예쁜 아이의 웃음, 몇 년간의 계절의 변화, 이 세상의 아름다운 몸짓은 사진에 담겨있지만 함께한 그 시간의 감정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공허함은 바로 잃어버린 그 시간을 잡아달라는 아우성이었다. 다시 그 시간 속에 놓친 가치를 주워 담기 위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전력질주하며 글을 써 내려갔다.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던 과거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놓쳤던 감정과 감성의 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움켜쥔 자아상이 찰나의 아름다움과 감성들을 가린 먹구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찾았다. 나의 정반합 트라이앵글
누구에게나 치우침은 있다. 단지 그 치우침의 각도가 다 달라서 그 균형점도 다 다르다. 정반합이 삼각형이라면 나는 현재 정(현재의 행복), 반(미래의 안락함을 위한 투자등 현실적 가치), 합(그 두 개를 더해서 가중치를 주고 나눈 평균값)이 같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어쩌면 현실과 감성을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은 내 욕심이 만들어낸 균형점일지 모른다. 사람마다, 혹은 같은 사람이라도 생애주기에 따라 이 정반합의 각도는 달라진다. 단지 내가 가장 편해지는 각도를 찾고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시선을 두고 성급하게 나아가려 하는 급해진 나를 발견하면 그 균형을 위해 잠시 멈춘다.
그리고 멈춤 뒤에는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는 나의 치우침을 조절해 주고 정반합의 균형을 잡아준다. 초록등인 나아감에 잠시 멈춤인 적색등을 켜고 성급한 나를 멈춰 세우고 삶의 균형을 맞춘다.
그렇게 글을 쓰며 나아가려 함의 속도를 조절하지만, 그 반대편을 향해 있는 미래 가치를 추구하는 내 모습을 배제할 순 없다. 그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하고 현실의 행복을 앗아간 악마 같지만, 나를 인내하게 했고, 참게 했고, 나아가게 했고, 발전하게 하며 목표를 달성하게 채찍질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쓰임 있는 나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 그 "반"이 한 일이다.
그 기운을 잘못 쓰면 악마가 되지만 적절히 버무리면 치우치지 않고 행복한 속도로 성장하는 나를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반"을 다룰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이 단순한 원리를 깨닫고 나를 바로 알고 글을 쓰며 성장하는 현재의 내가 나는 참 좋다. 어쩌면 글을 쓰는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미워했던 시절과 마음이 힘든 그 시절을 인내하며 헤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정반합 삼각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뜨거운 줄 알면 그냥 놓아버려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동안 살아온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움켜쥐고 괴로워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내려놓으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괴로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집착할 때만 잠시 괴로울 뿐 그 괴로움이 지속되지 않아요. 그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법륜스님의 행복 中]
이제 나는 나의 정반합을 버무려 다루며 삶의 마디마다 찾아오는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이전과는 다른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