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포레스트 아이스 블랜디드
알싸한 맥주 기운에 글을 쓰는 여유가 얼마만인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서 무작정 광화문으로 향했다. 뭔가 예전에 내가 하던 그 익숙한 방황을 하게 되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설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이다. 바보 같았다. 하지만, 아직 내 마음이 젊음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다.
가볍게 짐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꼬마와 가벼운 인사를 하고. 롤러코스터 같은 마을버스를 타고 답답한 지하철을 또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렸다. 딱히 경복궁을 갈 마음은 없었지만 땅 속에서 너무 답답해서 목적지까지는 땅 위로 걸을 생각이었다.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사진을 찍었던 그 출구를 통해서 경복궁으로 향했다. 나는 땅 속에서 나오고 있었고, 밖은 이미 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경복궁 광화문 안의 4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그 넓은 공간에서 궁궐 담 밖에 보이는 산이며, 빌딩이며 - 20대 초반을 나의 꿈으로 수놓았던 외교부 - 한 번씩 시선을 주고 궁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길었던 신호, 미국 대사관을 지나서 교보문고로 자연스럽게 가는 길.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이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짧은 생각에 빠졌다.
늘 가던 길을 통해 교보문고에 들어 가서 한동안 책을 읽었다.
교보문고 맞은편에는 스타벅스도 생겼었지만 20대 나의 모든 동선에 항상 들어있었던 커피빈으로 향했다.
이 곳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헤어지고, 매달리고, 울고, 그리고 소심한 복수도 하고.
자리를 잡고 '화이트 포레스트 아이스 블렌디드 생크림 올려 주세요'라고 까지 했는데
MZ세대로 보이는 알바생이 '그 제품은 단종'이란다.
'언제?!!'
이로써 나의 이십대와 정말 이별한 것 같았다.
웃긴 일이지. 이미 나는 삼십 대 후반에 들어섰는데 이제와서 나의 이십대와 이별하다니.
내가 자주 마시던 화이트포레스트아이스블렌디드의 단종과 함께 나의 찬란했던 이십대도 역사가 되었다.
너무도 편안하게 책을 읽다가 산책도 했다.
서로 싸우고, 다시 붙잡고, 같이 걷고 사랑했던 그 거리를 지나서 산책을 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항상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롯데 백화점을 지나,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항상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지는 그 계절 사이에 나는 이 곳에 온다 .
성당 뒤편의 공간에서는 촛불을 봉헌할 수도 있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할 수도 있다.
빨간 벽돌에 반사되는 봄볕은 그 자체로 따스하다.
바로 하루 전 겨울도 잊게 만드는 따사로움이 있다
온기와 포근함이 있다.
밝음이 있다.
그래서 이 곳이 좋다.
몇 주동안, 아팠지만 풋풋했던 나의 이십대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아파서 억지로 그 이름을 지웠던 사람과 많이 비슷해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불쾌하지 않았던, 잠깐 시간여행을 했던 기분이다.
그 덕분에 오늘 억지로 잊었던 기억들, 나의 발자취...아니, 그 당시 '우리'의 발자취를 다시 밟아볼 수 있었다.
내가 이십 대에 가장 사랑했던, 나의 사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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