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퇴사를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때 마음으로 따르고 존경했던 임원이 한 분 계시다.
물리적인 나이가 젊음은 물론이고, 생각과 마음이 젊은 분이셨다. 감정표현도 솔직하고,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는 분이었는데... 임원스럽지 않은 편안함에 자꾸 쳐다보게 되는 분이었다.
무엇보다 후배 직원들의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주시던 분이었는데, 그 분이 입버릇처럼 던지던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김과장.
회사를 만난 적이 있어?
만나본 적도 없는 애를 위해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적당히 해!
난 회사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머뭇거리는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그 임원분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어랏?! 김과장은 회사를 만난 적이 있나봐.
말해봐봐. 어떻게 생겼어? 키는 커? 인상은 좋고? 난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어가지고..."
당황스러운건 둘째치고,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까지 회사를 위해 일해왔던 10년이라는 세월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실체도 없는 회사에 대한 질문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그간 누군가 한 개인을 위해서라도 일을 할걸 그랬나 하는 뒤늦은 아쉬움도 아니었다. 그저 입사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단 사실에 머리 속이 하얘졌다.
난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었던 걸까.
"거봐~ 지금까지 회사랑 만난적 없지? 근데 뭘 자꾸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 본 적도 없는 애를. 아마 있다고 한들 걔는 김과장 모를걸?! ^^"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우리는 종종 이런 멘트를 남기며 회의를 마무리 한다.
"회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들 이번에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예요.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래요!"
프로젝트가 크고 중요할수록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눈엔 의지가 불타오른다. 내가 기필코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회사의 성공에 일조하고 앞으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중요한 성과를 남기리라. 퇴근길에도 그 약발은 떨어지지 않고, 밤낮없이 주말없이 헌신해서 회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길 때도 있겠지.
하지만 똑같은 상황, 똑같은 멤버가 모여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전무님한테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들 이번에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 잘 보이면 이 멤버 다 승진시켜 주신답니다. 고과 A도 보장하셨어요!"
"이번에 팀장님이 임원이 되느냐 마느냐가 걸린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예요. 최선을 다해서 우리 이번에, 임원 한 명 만들어 봅시다!"
만약 그렇게 이야기 했더라면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했을까.
실체가 없는 존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무엇을 위해 내 노력을 쏟아붓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만난 적도 없는 회사를 운운하며 자꾸 청춘을 바치라고 독려하는 것인가.
직장 3년차. 아직 어린 여사원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힘들줄 알고 있었던 업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싫은 업무로 발령될 위기임을 먼저 직감하고 스스로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그래서 후회는 없었다. 그룹장이 날 불러놓고 한 첫 마디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강사를 만날 때 만큼은
너가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렴.
너의 표정, 너의 행동 하나
그 순간 너는 그 강사에게 우리 회사인거야.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회사를 먼저 다닌 선배의 모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
가슴을 울리는 감동, 회사원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룹장님을 절로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캬아~ 소주를 부르는 한 마디라고 기억했던 감동의 도가니. 저 말 한마디의 약발은 무려 2년이나 갔다. (20대 후반의 찬란했을...지도 모를 연애의 기회까지 헌납하고 밤낮없이 회사에 충성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서른이었다. ㅠㅠ)
누군가를 위해 나의 노력과 시간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노력과 시간이 동시에 나의 꿈과 미래를 위한 투자와도 일치한다면 더할나위 없이 감사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살아보니 항상 그렇게 목적을 두고 살기가 쉽지만은 않다.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고, 잠시 느슨하게 긴장을 풀어놓고 싶을 때도 있다.
지금도 회사원인, 혹은 회사원이었던 우리가 막연하게 잡고 있는 마지막 끈이 바로 "회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나마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가끔은 외면해 버려도 덜 성가시니까.
임원을 위해 청춘을 바쳤는데 사내 정치싸움에 휘말려 그 임원분이 조용히 집에 가시게 된다면 나도 집에 가야하는 건가 불안해 질 것 아닌가. 내가 정말 싫어하는 임원이 내 직속 상관으로 왔다고 해서 '난 당신을 위해서는 일할 수 없어요!' 하면서 사표를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일테고.
그럴 때 우리는 "회사"라는 마법의 묘약을 꺼내어 마음맞는 사람들과 푸념을 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회사가 다 그렇지 뭐.
다만 막상 퇴사를 하고나서 드는 생각은 내가 회사를 다닐 적에 조금만 더 생각할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졌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랬더라면 내가 원하는회사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두고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의 모습이 그와 점점 같아지는지, 점점 더 멀어지는지를 꾸준히 지켜볼 수 있었을텐데.
그랬더라면 그 녀석과 내가 멀어지고 있는 시점을 미리 알아채고, 회사와의 이별을 좀 더 차근하게 준비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급하게 실망하고 너무 급하게 돌아서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결정을 되돌리고 싶어지는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단어 그대로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퇴사를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밤낮없이 주말없이 회사를 위해 젊음과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실체없는 회사를 위한 노력을 무작정 아끼라는 말보다는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는 그 회사가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그려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