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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화 Jun 13. 2018

엄마는 조리원에, 아빠는 호프집에

조리원 커뮤니티

 "아니, 남편이 친구들이랑 술 한잔 하고 들어오면 안 되겠냐고 하는 거예요. PC방 가서 게임도 한 판 하고 오겠다고. 그래서 안된다고 했어요!"

 "에이~ 그냥 보내주지 그랬어요. 남편들도 얼마나 답답하겠어."

 "아니. 나는 여기서 이렇게 답답하게 하루 종일 있는데, 혼자 놀러 간다는 게 괜히 서운해서요."

 "우리 남편은 조리원 와서 내내 핸드폰 게임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하루 오지 말라고 했어요. 침대에서 나 혼자 편하게 자야지!"

 "나도 우리 남편 그냥 집에서 자고 오라고 했는데... 오늘 아주 편하게 자겠구먼."


 엄마들의 조리원 생활은 피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빠들의 조리원 생활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귀여운 내 아기를 볼 수 있는 행복감이야 어디 비할 데가 없겠지만 먹는 것, 씻는 것, 자는 것 모두 엄마들에게 맞추어진 시설이다 보니 아빠들이 지내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것들이 많다.


 우선 내가 지내던 조리원의 경우, 엄마와 아빠들의 식사시간을 분리해서 운영하고 있어서 엄마들의 식사가 끝난 뒤 아빠들이 식사를 해야 했다. 살기 위한 한 끼의 식사. 아빠들은 서로서로 뚝 떨어져 앉아 허겁지겁 밥을 챙겨 먹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그리고 조리원 곳곳에는 분홍 옷을 입은 엄마들이 어슬렁 거리며 다니고 있으니 아빠들이 편히 돌아다니기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분홍 엄마들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어그적 어그적 느린 걸음으로 조리원 곳곳을 활보했지만 아빠들은 최소한의 동선을 선택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고 가급적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그나마 퇴근이 빠른 아빠들은 다행이었으나 퇴근이 조금이라도 늦는 아빠들은 까치발을 하고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사실 늦은 시간에 복도를 지난다고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불 꺼진 복도는 괜히 아빠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조리원의 시계는 아빠들을 위해 기다려주지 않았다.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엄마들의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온통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나마 정신줄을 놓아버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길 정도이다. 온몸에 전해오는 고통은 또 어떠한가. 사무실에서 종이에 손가락 끝만 살짝 베어도 밴드부터 찾았던 어제와 오늘은 달랐다. 어찌할 수 없는 출산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렇게 아기를 품 안에 안는다. 하지만 출산은 고통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는 사실. 상대적으로 진통이 덜했던 나는 아기를 낳고 나서의 고통이 출산 당시보다 몇 배는 더 컸던 것 같다.


 엄마들이 이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아빠들은 어떨까. 엄마들이 이만큼 힘드니 아빠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야지라는 의견에 나도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아빠들이라고 힘들지 않겠는가. 본인이 세상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으로 고통을 토로하고 있는데 손을 꼭 잡아주는 것 이외에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는 그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출산 후에 부모님들은 물론 몸이 성치 않은 산모와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작디작은 생명까지 챙겨야 하는 아빠들에게도 출산 전후의 며칠은 일생일대의 사건이자 정신줄을 바짝 당겨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조리원에서의 며칠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옆에 며칠 사이 살이 빠져 얼굴이 홀쭉하고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내 남자가 서 있었다. 남편도 아빠가 되어가는 며칠 동안 꽤나 신경을 썼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하기야 평소에도 힘들다고 내색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하루 종일 젖 물린다고 낑낑대다 새벽에는 가슴을 쥐어 짜가며 유축을 하는 나를 보고 피곤하다 이야기 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도 퇴근하고 쏜살같이 달려와 필요한 것 챙겨주고 아기랑 놀아주고(놀아준다고 해봤자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손가락 발가락에 손 대보는 것 정도이긴 하지만) 내 이야기 들어주는 것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퐁퐁 샘솟았다. 내가 힘든 것을 떠나 왠지 코 끝이 찡해왔다.


여보. 오늘은 집에 가서 자고 와요.
맥주 한잔 하면 피로도 좀 풀리지 않을까.


 남편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찾던 남자였다. 기쁠 때는 기뻐서 한 잔, 슬플 때는 얼른 힘을 내서 털고 일어나야 하니까 한 잔. 그에게 술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자 내일을 준비하는 활력소였다. 생각해보니 그 좋아하는 술도 며칠 째 입에도 못 대고 있었다. 내 몸이 힘들어 미처 챙겨주지 못했던 것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야 생각이 났다.


 남편은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지만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친구들을 불러 거하게 한잔을 나누진 못했도, 근처에 있는 내 동생을 불러 집에서 간단히 한 잔을 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며 내 눈치를 살폈다. 괜히 산모랑 아기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동이 불러서 집에서 거하게 한잔해요. 내가 보내줄 때 다녀와요. 여보가 에너지 충전해서 힘을 내야 나도 더 많이 도와줄 거 아냐. 퇴근길에 조리원 와서 아기 살짝 보고 얼른 집에 가서 쉬어요."

 "아... 그래도 될까?! 나야 하루쯤 시간 주면 좋긴 한데... 여보 혼자 잘 수 있겠어?"

 "뭔 소리야. 이 넓은 돌침대를 혼자 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몸도 찌뿌둥했는데 잘 되었지 뭐. 오늘은 대자로 팔 벌리고 잘 테야."


 함께 있어서 힘이 될 때가 있고, 가끔은 떨어져 있기에 서로에게 힘이 될 때도 있다.

 우리 부부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육아라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때론 반드시 함께 해야 할 만큼 힘들 때도 있을 것이고, 때론 따로 떨어져 서로의 에너지를 북돋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는 못했으나 육아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멀리 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함께 갈 나의 파트너에 대한 선수 보호 차원에서 우리 부부는 오늘 떨어져 있기로 했다.

 내 남자의 가려운 곳을 알아차리고 먼저 손을 내밀어준 나에게 주어진 보너스는 데굴데굴 굴러도 자리가 남는 널찍한 조리원 돌침대 전용 사용권! 오늘 밤엔 남편도 나도 꿀잠 예약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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