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났다.
하나는 결혼은 했으나 갓 신혼이었고, 나머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싱글들이었다.
첫번째 화제는 단연 내 뱃속에 있는 새 생명이었다.
그 때의 내가 그랬듯이, 그 녀석들도 내 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신기하게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몇 개월인지 물어보고 다시 또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티셔츠 밖으로 봉긋 솟아오른 내 배를 쳐다보면서 몇 년안에 녀석들의 배도 이렇게 불러올거란 상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손톱만큼도 하지 못했었다. 아마 녀석들도 그런 상상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자연스레 화제는 내 퇴사로 옮겨갔다.
언니, 솔직하게
왜 그만두신 거예요?
퇴사를 하고나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저 질문에는 사실, 회사생활 중 무엇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기에 그만두기까지 한 것이냐 라는 속뜻이 숨어있다. 6개월 동안 왜 퇴사했냐는 질문을 꾸준히 받아보니 대체적으로 그런 것 같다. 순전히 내 감이다.
퇴사를 한 사람이 본인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똑같은 이유를 댄다면, 그 힘든 것을 버티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본인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
만약 본인이 생각하기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이유를 댄다면, 회사생활 하면서 저 정도 힘든 것도 감내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나. 그간 온실 속에서 자랐구만~ 하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결국 다 본인을 위로하기 위해 물어보는 방패막이인 것이다. 사람사는게 다 그렇다.
후배가 말을 잇는다.
후배의 친구들은 대부분 2~3년차 신입사원이다. 한창 슬럼프를 겪는다는 마의 3년차, 만날 때마다 퇴사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에 대한 불만일색. 그 상황에서 본인을 꺼내지는 않고 계속 퇴사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단다. 좀 빨리 회사생활을 시작한 친구는 벌써 5년차인데, 몇 년전부터 툴툴 거리면서도 아직 첫 직장에 잘 다니고 있단다. 그래서 그렇게 회사가 싫은데 왜 퇴사를 안하냐고 물어봤더니 돌아온 답은 한마디. 그 말을 듣고 후배는 나를 만나면 왜 퇴사했는지 꼭 물어봐야지라고 마음을 먹었단다.
생각보다 월급이 너무 빨리 올라.
숨 돌리면 인센티브 주고.
내년이면 벌써 대리 달아준데.
나는 교육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나는 내 일이 좋았고, 하고 싶었다. 학부 전공과 전혀 무관한 일이었지만 첫 직장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잘 기획되고, 고민 끝에 만들어지고, 진심과 정성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가 그런 멋진 교육들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믿었고, 그런 교육들을 꾸준히 만들어 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는 점점 교육을 수익률 좋은 사업으로만 보려고 했다. 회의가 시작되면 왜 우리는 시원스쿨처럼 홈쇼핑에서 교육과정을 판매하지 않는지, 파고다처럼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사용하지 않는지에 대한 논의만 길어졌다. 교육과정에 대한 고민은 둘째 문제였다. 아니 하루하루 세 번째, 네 번째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교육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올바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컨텐츠를 만들고 싶어서 퇴사를 한다고 말했다. 사석에서는 좀 더 수위를 높여서 회사의 비전과 나의 비전이 맞지 않아서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술을 한잔 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임원 중 몇 분은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그런 컨텐츠를 만들고 싶으면 회사에 남아야 한다고 했다. 혼자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냐고, 아무것도 없는 맨 바닥에서 시작해서 얼마나 대단한 컨텐츠를 만들 수 있겠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그 사람들과는 절대 내가 원하는 컨텐츠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후배 말대로 10년차나 되어서 회사를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졌고, 슬럼프도 여러번 넘어봐서 어떻게 하면 한 두달 버틸 수 있는지 감도 온다. 꼴보기 싫은 상사의 비위도 제법 티나지 않게 맞출 수 있고, 험한 꼴 안 당하고 적당히 빠져나갈 요령도 생겼다.
꾸역꾸역 한달을 버티면 약속한 월급을 지체없이 입금해 줄뿐더러 때맞춰 인센티브도 적지 않게 집어준다. 직급도 과장이니, 사실 얄미운 후배녀석 몇 명 쯤은 안보고 살 수도 있다. 원치않는 자리에는 안가도 되는 짬밥도 있다.
그렇게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열가지, 스무가지, 아니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잃을 것이 너무 많아진다.
과차장들이라고 해서 회사에 대한 불만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잃을 것이 너무 많아졌다. 퇴사라는 소리만 들어도 과연 바깥 세상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겁이 난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한 생활을 너무 오래 해왔다는 증거다. 그래서 오늘도 내 동기들은 회사욕을 하면서 열심히 회사를 다닌다. 심지어 성실하기까지 하다.
대단한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회사를 나왔는데 6개월이 지나서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내게 퇴사이유를 물어대니 내가 하면 안되는 일을 하고 나온건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매일매일 불만을 내뱉으면서 다닐바엔 조금 부족하더라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직접 만들어 봐야지 라고 생각했던게 썩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더 잘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하게 되고, 그래서 꼭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남들에게는 불안한 선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분명 좋은 자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