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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화 Jul 17. 2017

밖에서는 회사원, 안에서는 엄마란 이름으로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보다 말이 편한 사람이 있다.
나는 글보다는 말이 편한 사람이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순간 녹음을 해둬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뱉은 말은 내가 생각해도 참 멋지다 라는 순간이다. 물론 지나고 나면 그리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멋진 사람이 되는 건 매번 실패다. 평소에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던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입술 밖으로 뛰쳐나올 때도 있다. 꾸역꾸역 기억을 해뒀다가 나중에 메모를 하려고 해도 그때만큼의 느낌은 살지 않는다. 모자란 내 기억력 탓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한참 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쯤, 유료로 코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 그만큼 마음이 답답했던가 보다. 코칭은 내가 말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깨닫는 것이 정석이란다. 그래서인지 코치님 앞에서 참 많은 말을 했고, 나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몇 주의 시간이 흘렀을 때, 코치님이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아이와 육아에 대한
믿음이 강한 것 같은데,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회사생활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우리 회사에는 유독 여직원이 많았다. 여성 임원도 있었고(물론 미혼이셨지만...;;;) 차 부장 중에도 여성 분들이 아주 많은 편이었다. 첫째, 둘째, 셋째는 물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돌 무렵 아기부터 대입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 자녀까지. 일하는 여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고 느끼며 살아온 10년이었다.
나 또한 다자녀의 꿈을 키우고 있는 예비엄마 꿈나무였으나 막상 정곡으로 질문 공격을 당하고 나니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아이를 나 아닌 누군가에게 맡겨두고, 회사로 출근하게 된다면?!
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돌아서야 한다면?! 혹 야근하는 날이 생기거나 주말에 출근해야 하는 급한 일이 생긴다면?!

세상 모든 워킹맘들이 겪고 있는 상황들이 짧은 시간 동안 영화처럼 스쳐지나갔다. 물론 여주인공은 나였다. 코치님 앞에서 한참 동안 눈알을 동글동글 굴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었던 말이고, 머릿속으로 정리해 두었던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누구보다 먼저 내가 설득당하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내 마음속에 고이 자라고 있었던 나의 신념이라고 믿는다. 

제가 계속 이 곳에서 일을 한다면
적어도 제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제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일에 대한 가치의 문제였다.
일을 하는 엄마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엄마인지의 문제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나는 바깥세상에서 받아오는 에너지로 하루를 사는 사람이다. 사람 만나는 것도 즐기고, 인정받는 것은 더더욱이 좋아한다. 집에 있는 날엔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빠져버린다. 의욕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잘 씻으려 들지도 않는다. 살림에 소질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나는 본인의 일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다고 육아에 대해 무관심한가. 그것도 아니올시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같은 것도 있는 편이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엄마로서의 내 모습이 바로 섰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야 더 행복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입 밖으로 장황한 설명을 내뱉고 보니, 문득 그때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임원이랑 싸우다가 결국에는 한 소리 듣고 꾸역꾸역 하고 있는 프로젝트. 사장님 의중에 맞춰, 상무님 의중에 맞춰 하나의 기획서를 몇 번이나 고쳐 썼던가. 신나게 내밀었다가 보기 좋게 까인 제안들은 또 몇 개였던가. 그 일들을 하느라 매일 이어지고 있던 야근, 그리고 결과 없는 회의들.

내 아이에게 미안해질법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습관성 야근이 즐비했다. 내가 아는 과차장님들의 아이들은 할머니와 저녁을 먹고, 야근한 엄마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다. 
내가 하던 일을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과연 내 아이와의 시간과 맞바꿀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성공한 여성 임원의 길을 걷고 있던 코치님은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원래 아이가 좀 크고 나면, 여성리더들이 그 고민을 제일 많이 하게 되는데... 좀 빠른 편이네요. 마치 아이를 낳아서 길러본 사람인 것처럼요. 그런 고민을 지금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네요."

코치님의 피드백은 내 귀를 스쳐 지나갈 뿐.
나는 그 이후로 내 일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퇴사에 대한 다짐은 그 뒤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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