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자.
삶을 보면, 괴로움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 전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확실성과 유한성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상실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왜 나인가”라고 묻지만, 사실 그 질문은 곧 “왜 아니어야 하는가”라는 답으로 돌아온다. 괴로움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한 누구에게나 돌아가는 조건이다.
창공을 나는 새를 자유의 상징처럼 바라보지만, 그 세계는 먹고 먹히는 치열한 경쟁이다. 약한 새는 굶주리거나 포식자의 먹이가 되고, 강한 새도 끊임없이 경쟁과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 겉으로는 우아한 비행처럼 보여도, 본질은 죽음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몸부림이다. 모든 존재는 자유로워 보이는 순간에도 고통을 전제한 세계 속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흔히 부자나 유명인을 부러워하지만, 그 화려한 외관 뒤에는 끝없는 노력과 긴장이 숨어 있다. 스포츠 선수들의 퍼포먼스 뒤에는 끊임없는 연습이 있고, 예술가들의 창작물 뒤에는 수많은 고민과 정서적 노동이 존재한다. 부와 명성, 재능이 편안함을 보장하지 않듯,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삶을 판단할 수 없다.
괴로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 순간순간 찾아오는 작은 위안이다. 예를 들어 가족의 따뜻한 말 한마디, 허기에 먹는 따뜻한 밥, 달린 뒤 마시는 물 한잔 같은 순간들이다. 고통을 견뎌낸 사람만이 그 위안의 무게를 자각할 수 있으며, 그 위안이 다시 고통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위안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이야말로 삶을 이어가는 자원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괴로움과 위안의 순환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늘 안정과 영속적 행복을 갈망한다. 그 모순 때문에 받아들임은 완전하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결단해야 하는 과제다.
결국, 삶은 괴롭다는 명제는 절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괴로움을 제거할 수 없음을 알고, 그 속에서 순간의 위안을 자각할 때 삶은 이어진다. 삶은 괴롭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찰나의 위안이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실재다. 괴롭다는 자연스러움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