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다
식물성만 먹는 비건식을 할 때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마땅히’ 잡식성이다. 내 선택을 언짢아 하는 기력이 느껴졌다. 잡식이나 비건식이나 개인의 선택인데 방어적으로 대하는 듯했다. 속으론 발끈했지만, 당신의 ‘마땅히’는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이치로 보아 옳게’라기에 내가 받아들인 ‘마땅히’와 좀 달라보였다. 나의 ‘마땅히’는 복종, 시키는 대로, 파쇼적이다. 단어에 입힌 색깔이 감정 어딘가 저장된 거다.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같은 두려움을 겪더라도 해석이 다르고 반응이 다르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소리를 하지? → 아, 우리의 사전이 다르지! → 저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이런 호기심이 대화를 이어간다. 기분 나쁜 건 내 몫이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철학자 강신주가 해석한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소통하는 자세의 진수다.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도토리 3개, 저녁에 4개를 제안하니, 불만이 거셌다.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가 단번에 나온 타협이 아니다. 그럼 아침에 2개, 저녁에 5개는? 아침에 5개, 저녁에 2개는? 제안하고 함께 고민해서 선택했다. 이 해석은 감동이었다. 궁금해하며 알려고 하는 것, 내식대로 해석하기 전에 먼저 묻는 것, 소통은 귀 기울이는 자세다.
이걸 먹으면 좋다더라, 이런 식이가 좋다더라, 유행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다. 따라하지만 경험으로 확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알게 된다. 나와 맞다고 항상 맞지 않다. 때마다 꼭 먹으란 법도 없다. 나도 세상도 함께 순환하며 변한다. 마음의 평화를 얻겠다고 시작한 명상 덕분에 감각이 살아있었다. 몸을 이해하고, 직접 실천하며 반응과 이론을 비교했다. 인체 코어가 중요하듯 삶의 중심을 잡았다. 나는 소식과 걷기 그리고 호흡의 중요성을 찾았다.
요리하는 모임, 글쓰는 모임, 자아성찰 모임을 다녔다. 사람들은 ‘토크’ 하고 싶어 한다. 나와 소통한다는 게 뭔지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타인과의 소통에서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보인다. 나를 인지하고 나니 타인이 말하려는 게 뭔지 보려는 자세도 생겼다. ‘토크가 하고 싶은’ 사람들, 자기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구나, 알게 된다. 나는 소통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와의 소통을 시작해 보는 것, 소통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