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의 과제, 성(性)
누군가 다가와 당신을 좋아한다,고 어렵게 말을 꺼낸다. 이해할 수 없지만 좋아해주는 게 고마워 내민 손을 잡는다. 좋아한다고 해놓고 버릴까 봐 두려웠다. 온전하게 사랑하기보다 매일이 극적이었다.
넌 예측할 수 없다,던 H는 어느 날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패턴이 보인다,며 안도했다. 결혼을 말하기에 헤어졌다. 결혼을, 두 번씩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살고 싶으면 그냥 살면 되지, 왜 굳이?
해수는 나에게 고딩과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도도하고, 독립적인 줄 알았겠지, <어린 왕자>의 장미‘과’인 줄 모르고. 그는 어린 왕자‘과’가 아니었고, 결혼 6년째 되던 해 여우 곁으로 떠났다. 나는 세상이 끝난 듯 처량했고, 내 곁에 있어주면 사랑했다. 남자라면 다 좋다,고 떠벌렸고 난 쉬운 여자,라며 당당했다. 오락가락 말로 사랑하고 허무해하다 돌연 차가워졌고, 남자 혐오증이 있냐는 소리를 들었다.
김연수 소설 <세상의 끝 여자 친구>에서 ‘자신이 만난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환상이 보인다’는 글을 읽고 나도 따라 상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다 닮아있을 것 같아 허탈한 웃음이 났다. 만나는 남자 유형도 습관처럼 익숙함에 끌린다. 내가 그대로면 유형도 고착된다.
네댓 살 때 5원을 쥐어 주는 넝마주이 손을 잡고 가다 엄마에게 구출됐다. 열 살 때 뽀뽀하면 100원 준다며 방문을 잠근 하숙생 오빠를 피해 울며 도망가면서도 손에는 동전을 꼭 쥐고 있었다. 대학 때 남자친구가 생겨 사진을 보여주면 너는 남자면 다 좋아하는구나, 엄마는 말했다. 언뜻 보면 돈을 좋아했는가 싶다가도 단지 애정이 고팠다고 결론했다. 난 남자 없이는 못 살아!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남자가 있어도 세상이 허무했다. 가슴의 허기는 누가 채워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을 갈애하는 나를 안아주다 보니 내 안의 브레이크를 발견했다.
속세를 떠나 도 닦겠다고 T에게 이별을 고했다. 익으면 동동 떠오르는 수제비처럼, 수행하며 낯선 의식들이 동동 떠올랐다. 특히 성(性)과 혈액순환을 연결하는 관점은 근원적 존재를 의식하게 했다.
T와의 연애 이후 손 내미는 유형이 변했다. 불안정한 형태임을 알면서 섣불리 만지고 싶지 않았다. 익숙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He를 알아보기 위해 내미는 손이라고 덥석 잡는 나를, 멈추었다.
남자 없이 6개월, 이라는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헸을 때, 알아들을 수 있을까 너만 이상해지지, 그러기에 말았다. 그리고 10개월, 1년, 2년, 남자 없는 시간이 이틀도 길던 나에겐 기특한 일이었다. 난 남자 얘기가 재밌다. 너네들이 아는 그게, 그거랑 다른 이것도 있다고, 근질근질하다. 후성유전학 스위치의 온오프 코드를 발견한 듯 He스토리는 내 인생을 조목조목 기억할 수 있는 정서의 스위치다. 남자랑 새빨갛게 철학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게 내가 풀어낼 이야기다.
남자, 허무, 외로움, 고통, 죽음에 대한 고뇌로부터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몸, 마음, 호흡, 음식을 통해 피, 순환을 감각하고, 소비와 식욕의 딜레마를 내 것으로 감싸 안았다. 혈액순환, 소통, 관계를 통해 사랑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 가는 과정, 온전하게 사랑하기 위해 나를 잘 알아가려는, 우당탕탕 자아성찰 실크로드의 여정에 당신이 나의 따뜻한 연인이 돼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