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 특성 상, 나는 꽤 많은 사람을 만나 깊이 관계한다.
때에 따라 이삼 년, 길게 보면 사오 년.
한 사람과 가족, 그 주변 사람과 만나 삶의 크고 작은 기쁨을 찾아 누리도록 돕는 일을 한다.
지난봄, 나는 근 오 년을 근무했던 부서에서 바로 옆 부서로 자리를 옮겨가야 했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조직을 위한, 몇몇 어른에 의한 결정.
그래서 처음 몇 주, 몇 달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머리가 지끈댔고 온몸에 미열이 계속됐다.
그리고 벌써 삼 개월이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새로운 부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만남,
또 여러 관계에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적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쉽진 않다.
그간 해온 일의 양이 결코 적진 않음에도, 심지어 이직도 아닌 고작 바로 옆 부서로 자리를 옮긴 게 전부인데.
때로는 무엇을, 어떻게, 어떤 순서와 기준으로 해야 하나, 뒤죽박죽일 때가 많다.
지난 십 년을 꽤 성실히 살아왔고 나름대로 실력을 쌓고 바탕을 만들기 위해 공부, 연구에 부지런히 살았는데,
이럴 때마다 나는 이 모든 게 다 허상 같단 생각을 한다. 그게 도대체 무슨 쓸모 있나.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스물네 살 여름,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일이 년은 대체로 이 ‘무능감’에 파묻혀 산 것 같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삐거덕댈 때, 주변 사람에게 질타, 비난, 비판받을 때,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맡았으면 나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만들었을 텐데….’
삼사 년, 사오 년, 그리고 벌써 십 년.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무능감 보단 유능감, 자부심, 또 자긍심에 도취되어 산 것 같다.
익숙하고 능숙하게 여러 일을 감당했고 나름대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감각은 마치 스물네 살 나를 다시 만난 듯, 불안하고 우울하게 했고 막막하고 막연하여
종종 숨이 턱턱 막혔으며, 때로는 슬픔에 잠겨 울컥 눈물 나게 했다.
그리고 몇 주 전, 그날도 나는 지난 오 년간 매일 같이 오른 그 비탈을 따라 출근하는 중이었다.
이른 더위에 아침부터 이미 정신이 혼미했다.
쉴 새 없이 이마와 콧등의 땀을 닦아내며 언덕을 오르는데 저기 중턱 즈음에 낯이 익은 네 사람이 있다.
이전 부서에서 오 년간 관계했던 어르신 네 분.
음식 솜씨 좋은 이 씨 어르신, “뚱뚱한 사람치고 이렇게 귀여운 사람 없을 걸?” 하던 나 씨 어르신,
손등이 유독 보들보들했던 채 씨 어르신과 늘 ‘극존칭’을 쓰며 나를 존중, 존대해 주던 황 씨 어르신.
“우리 최 선생님 아니야?” 네 분은 별안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한꺼번에 하는 탓에, 알아듣는 데에 한참이나 필요했다.
아무튼 반갑단 이야기, 이렇게 보니 더 좋단 이야기.
평균 나이 팔십 대 초중반 어르신 네 분의 박수를 받으며 출근하는 사람,
출근만으로도 이렇게 축하와 축복, 응원과 환대받는 사람은
아마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에서 찾아봐도 몇 없을 테다.
그 순간만은 대기업 총수 안 부럽고 레드카펫 위 배우, 가수라도 된 양 괜히 어깨가 우쭐했다.
그리고 지난 몇 달간 나를 괴롭게 했던 무능감, 무력감 틈 사이로 또 다른 감각이 피어났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 차고 넘칠 만큼 주고받던 그 감각, 유능감, 자부심과 자긍심의 원천, 바로 사랑이다.
나는 비탈을 올라 출근하던 그 짧은 순간동안 아주 얼마 전까지 이렇게 큰 사랑받던 사람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그 중턱을 괜히 한번 바라봤다. 오늘은 아무도 없다.
'없음'에도 나는 또렷이 보고 들을 수 있다.
옹기종기 몸을 겹쳐 앉은 네 분의 무릎과 여덟 개의 작은 발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우당탕 하고 나선 하하 호호하던 웃음을,
반달 모양 눈과 입을,
‘힘들지? 할머니는 다 알아.’ 하며 양손 크게 치던 박수 소리를,
나는 선명하게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