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두 딸을 생각했을 테다.
아직 어린 두 딸을, 먹여 살려야 하는 두 딸을, 가르쳐야 하는 두 딸을 생각하며 참고 견뎌냈을 테다.
두 사람의 성격을 아는 나로서는 존경을 넘어 '경외'의 마음마저 든다.
나는 나 하나 먹여 살림에도, 사는 게 참 버겁고 막막하단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조직과 사회에 환멸이 나고 그 가운데 마주하는 상식 밖의 인간 군상에 대해 아주 진저리 칠 때도 잦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 걸까? 곱게 나이 들어야지.
으휴, 너는 안 돼. 그냥 그렇게 살다 조용히 사라져라.
그때마다 나는 골방 같은 데에 기어 들어가선 문을 걸어 잠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이다, 상상.
골방은 무슨 골방, 출근해야 한다.
다만, 정말 안 해, 못해, 싶은 날은 반나절, 길면 하루정도 휴가를 쓴다.
그 시간 내내 어떤 인간과도 말을 주고받지 않는 게 철칙이다.
골방에 들어앉아 문을 닫는 대신, 입을 꾹 닫고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좀 낫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걸어 잠글 문도, 입도 사치였다.
참고 참고, 또 참고.
물론 가끔가다 한 번씩은 자영업 하는 사람의 본분(?) 같은 걸 잊고 그냥 한바탕 해버릴 때도 있었다.
이게 사진이냐, 얼굴이 왜 이렇게 나왔냐, 돈 안 줘, 못 줘, 따위 말에 우리 아버지는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생긴 대로 나온 걸 무슨 수로 고쳐 놓냐, 라며
맞받아쳤고…. '그렇게 생겨먹은' 그는 노발대발했고,
어머니는 현금을 꺼내 카운터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서는 돈 안 받을 테니 썩 꺼져….
아니, 나가, 라며 그를 내보냈다.
두 사람이 공통되게 하는 말은, 지금 같았으면 그렇게 안 했지, 인데 나는 잘 못 믿겠다.
성격이 어딜 가나.
근근하게 유지하던 사진관은 이천 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그 형국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됐고, 몇 년 지나서는 휴대전화로도 충분했다.
지금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그즈음부터 어머니는 사진관을 아버지에게 온전히 맡겨두고 다른 일을 찾았는데,
그 종류가 정말 가지각색이다.
컴퓨터로 간단한 작업을 하는 단기계약직, 외삼촌이 운영하던 사업장 총괄 관리,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전화 업무 등등, 어머니는 용감했다.
왜 두렵지 않았을까, 당연히 겁이 났겠지.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까.
컴퓨터를 못해 헤맸고, 전화 걸고서는 입이 얼어붙어 버벅대고,
한참 어린 상사에게 못된 말을 듣고,
좌절감과 모멸감, 나는 왜 이렇게 못 할까, 싶은 마음에 몰래 눈물짓고.
어머니의 좌절과 실패와 눈물을 처음 보게 된 날, 사실 나는 꽤나 당황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니, 분명 일터에 있어야 할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게 아닌가.
분위기는 냉랭했고 안부를 묻는 물음에도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세 시간 즈음 지났다. 여전히 집안은 잠잠했다.
아버지가 퇴근했고 온 식구가 모여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던 아버지의 짧은 질문은 어머니로 하여금
자식 앞에서는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드러나게 했다.
분노의 농도는 점점 짙어졌고, 말미에는 거의 울분을 토해내는 지경이었으며
그 화살의 방향은 밖이 아닌 어머니,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쉽게 말해 퇴사를 권고당한 건데, 지난 삼 개월간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도저히 그곳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 밝혀 적을 순 없지만, 그곳은 지금도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큼 큰 기업의 콜 센터였다.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정보인데 '콜'에도 종류란 게 있다.
인(in) 콜과 아웃(out) 콜,
인 콜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전화이고, 아웃 콜은 그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쉽게 말해 인 콜은 각종 고객센터의 민원 대응이고
아웃 콜은 상품 권유를 목적으로 하는 무작위 광고, 영업 전화이다.
어머니는 인 콜 업무를 했다. 한 삼 개월 즈음은 한 것 같다.
난이도로 치면 인 콜이 아웃 콜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한다.
각종 민원, 문의, 항의 전화를 받고 절차에 따라 사과, 답변, 대응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절차라는 게 툭하면 턱 하고 몸에 씌어지는 게 아니다 보니, 어머니는 여기에서 많이 헤매야만 했다.
특히, 전화와 컴퓨터를 '동시에' '잘' 다뤄야 하는데 이미 쉰 살이 넘은 어머니에게 이는 무리였다.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라면,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더라면 어떻게든 해냈을 사람이다.
삼십 년 넘게 함께 산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확언할 수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아홉 달 하고 보름을 있어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한때는 한 몸으로 살아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어머니에 대해 적어도 그곳 사람보단 더 내밀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다 자부한다.
어머니는 배움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천천히, 묵묵히 자기 할 몫을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란 사실을,
나는 나의 전부를 걸고 증언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데에 관심이 없다.
상관은 배울 시간 따윈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만 두란 말을 하는 데도 거림 낌 없었다.
그 일이 있던 날 밤, 나는 밤새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숨, 또 한숨, 통증,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통증.
그리고 한참 지나서야 나는 그 자잘하게 파고들던 통증이 처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됐다.
일곱 살 때였다. 아마도.
나에게는 한 살 많은 친척 오빠, 어머니에겐 조카가 우리 집에 온 날이었다.
사실 당시 그 오빠는 거의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별 특별할 게 없는 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날 나는 노란색 스키 바지 같은 걸 입고 있었다.
스키 탈 때 주로 입는, 겉감은 반짝반짝하고 약간 부스럭거리는 방수 원단이고
그 안은 솜이 얇게 들어있어 움직이긴 거북한데 따뜻한 걸로 치면 그만한 게 없는, 그런 바지였다.
그날 나는 작은 방에 들어앉아서는 문 밖으론 결코 나가지 않겠노라, 조용히 결심했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던 어머니는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다.
스키 바지가 문제였다.
그 노란 스키 바지는 그날 큰방에서 난리법석을 치며 놀던 그 오빠 바지였다.
그는 그 옷이 아니어도 입을 옷이 차고 넘쳤으며, 때문에 노란 스키바지는 어디 한 구석에 처박혀 있다
다른 옷과 섞여 우리 집에 오게 된 것이었다.
평소라면 물려받은 옷도 아무 불평 없이 잘 입고 다녔던 나였으나, 그날은 아니었다.
그는 종종 우리 집 형편에 대해 "너희 집은 거지잖아" 따위 말을 내뱉곤 했었는데
노란 스키바지를 입고 그 앞에 서는 순간, 또다시 그 같잖은 말을 들을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글이라도 쓰고, 할 말은 어느 정도 잘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의 말을 반박, 반항, 맞서 싸운 적이 없다.
그의 집은 부자였고, 우리 집은 (그와 비교하면) 가난했으므로.
물론 당시 그의 나이는 여덟아홉 살, 많아봐야 열한 살, 열두 살이었다.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 날의 그를 무작정 비난, 고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도 어렸고, 나도 어렸다. 다만, 궁금하다.
그 어린아이 입을 통해 나온 그 말이, 정말 그 오빠의 머리에서, 뇌 어느 지점에서
'자생'하여 튀어나온 말이었을까?
그건 아니라 본다. 누구에게 들었을 테다.
누가, 누구를 향해, 어떤 기준에서 지껄였던 말을 듣고서는 뇌 어느 지점에 얕게 묻어놓았을 테다.
그 말이 어느 순간 툭 튀어나왔겠지.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그냥 놀림거리, 내뱉고 나면 그만, 그는 결코 들을 일이 없는 말,
그 어떤 찔림 없이, 주워 담을 이유조차 없을, 그냥 그런 말.
그리고 나는 그 오빠 앞에서 처음 그와 같은 말을 내뱉은 어른이 누구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 오빠 있는 큰방으론 절대 안 가, 못가, 하며
버티고 선 것이었다.
나의 완강함에 어머니는 약간 알아차린 것 같다.
왜 그래?라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딱 한마디로 대답했다.
창피하단 말이야.
오빠 앞에 이 옷 입은 모습을 내보이는 게 나는 싫어.
놀림받고 싶지 않아,라는 뒷말은 차마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울음이 났다. 어머니도 같이 울었다.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한때 나의 일부였고, 한 몸으로 살던 나의 어머니가,
세상의 전부였던 나의 어머니가,
그 어떤 풍파에도 나를 품어 지켜내던 그 강한 어머니가,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순식간에 슬픔으로 잠식되는 얼굴을, 목이 매여 무겁게 질척이던 목소리를.
어머니는 그 옷을 입지 말라했다.
그러고선 바로 다른 옷을 꺼내 갈아입게 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오빠 앞에 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 놀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먹고, TV 보고 잠을 잤다.
노란 스키바지는 그날 이후로도 입은 적이 없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두툼한 스키 바지를 여러 벌 사 왔고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옷을 입었다.
이렇게 끝이 났다. 싱겁게도.
우리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 놓은 적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 두 사람 다 그 일을 결코 있지 않았음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음을.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