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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미워했고 사랑하는_나의 어머니(3)

by 최우림

(1, 2편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긴 시간, 은근하게 지속되어 온 것이라면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짧은 시간, 격렬하게 타올랐다 사그라드는,

하지만 어느 한편에선 나직이 부글대다 때가 되면 또다시 끓어 넘쳐 버리는, 그런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첫 갈등은 스무 살 때였다. 대학 진학 이후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과 불안으로,

마치 사춘기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온갖 데에 예민까칠하게 굴곤 했다.

사춘기 아이 '같은' 게 아니다. 사춘기가 맞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때는 당장 닥친 시험과 과제, 수시와 수능, 논술에만 집중했다.

사춘기고 뭐고, 겪을 틈조차 없이 살다 보니 때를 놓친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그냥 지나갈 순 없지. 늦은 사춘기가 왔다. 대학 가자마자.

그리고 이때는 어머니의 갱년기와 딱 맞물려 있던 최악의 시기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 너의 사춘기, 나의 갱년기'라는 어느 배우의 인터뷰처럼

우리 두 사람은 '사춘기 대 갱년기'라는 타이틀 아래 정말 불꽃 튀는 싸움을 했더랬다.

둘 다 고비였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미처 다 분출하지 못한 부적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고,

어머니는 몸을 갈아 넣어가며 노동하던 때였으므로,

큰딸의 급(急) 발진을 온전히 다 품어 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리 둘의 싸움은 반년 정도 지속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끝이 났다.

누구 하나 항복하지 않았으며, 그렇다 해서 어느 누가 다른 한쪽을 크게 이긴 형국도 아니었다.

그냥, 둘 다 너무 바빴다.

작은 딸의 '나, 음악 할래' 선언과 함께 어머니는 더더욱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했고

나는 반년 정도 사춘기를 앓다 닥쳐오는 과제와 시험공부, 주말에는 자원봉사 활동,

이력서 한 줄 더 채워 넣기 위한 각종 대외 활동 등등,

어느 시점부턴 하루 서너 시간 밖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들들 볶고 몰아붙여가며 살다 보니 어머니와의 갈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2차 전의 시작이다. 종전인 줄 알았는데 휴전이었구나.

당시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때로 서류 쓰고 면접 보고, 낙방하던 때였으며

어머니는 사진관 폐업 후 또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던 때다.

우리 두 사람은 시도와 실패의 반복 가운데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취업'이란 녀석을 조금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금방 될 줄로만 알았다. 나름 자신 있었다.

대학 사 년 내내 장학금 받아가며 공부했고 학점 관리 철저히 했다.

주말마다 자원봉사와 대외 활동, 대학 사 학년 때는 주 이삼일은 학교 공부,

나머지 이삼일은 모 재단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했다.

일 년에 한두 번 토익 시험을 봤고, 대학 졸업 즈음에는 초고득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숫자는 만들어 놓았다. 됐어, 이만하면 괜찮을 것 같아.


대학에서 본 나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사회에서 나는 그렇게 쓸 만한 노동력이 아니었나 보다.

조기 취업을 자부했던 나는 대학 졸업하고 나서 다섯 달 만에 첫 직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오 개월동안 나는 거절, 거부, 탈락, 응, 너는 안 돼,라는 말의 집중 공격으로

정말 너덜너덜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간 이렇게 짧은 시간 대비 많은 거절을 경험했던 적이 과연 있었나, 싶다.

아마도 대입 때? 그때는 이렇게 까진 아니었다.

거절 앞에서도 정신 잘 붙들고 있었던 이유는,

그 이후 삶을 주변 여러 어른과 의논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미룰 수도 있고,

아무튼 그 모든 과정을 '함께' 감당할 수 있단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업은 달랐다.

여러 어른과 의논, 대책 강구도 한계가 있다. 결국 당사자 몫이 크다.

상황에 따라 조금 미룬다? 실제로 주변에는 휴학, 졸업 유예,

그게 아니면 취업을 자체 유예하고 아주 다른 일, 다른 경험, 또는 온전한 쉼을 갖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빨리 취업을 해야했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살 때즈음에는 취업을 하고 어느 정도 자리 잡고 나면 공부를 하고,

그다음에는 이렇고, 그러고 나선 또 이렇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집안 사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단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 대학 사 년 돈 쓴 만큼 이제 자기 몫을 좀 해야한다, 라는

괜한 책임감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그 시작조차 하지 못해 이렇게 빌빌 거리고 있는 꼴이…. 정말 스스로 꼴도 보기 싫었다.

문제는 어머니도 나를 꼴 보기 싫어했던 건데(?), 아마 다급했을 테다.

우리 아이가 저렇게 상처받고 좌절하고, 실패하고 주저앉고

이게 반복되면 아주 눌러앉아 허물어져 버릴 까봐, 그게 겁이 났을 테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여기 한번 찾아봐라, 여긴 어떻니?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좀, 좀.

아니, 엄마.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

늦잠 자고 집안에 널브러져 있는다 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야.

노력하고 있고 시도하고 있고, 좌절하고 있고 원망하고 있어.

그만, 나를 좀 그만 닦달해.

그때 나는 차마 이 말을 차분하게 다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그럴 만한 힘도 없었으며, 이 한두 마디를 입 근처로 끌어다 놓고 나면 바로 울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다 나를 거절, 거부해도 엄마만은, 엄마만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럼 나는 어디에 가야 해? 이곳에서마저 편히 있을 수가 없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이 싸움은 취업과 함께 끝이 났다.

다시 입밖에 낸 적 없다. 이렇게 글로 쓰는 데도 십 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십여 년 전 그 몇 개월이 나에게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있다.

어떤 마음에서 한 일인 줄은 충분히 이해하나, 그렇다 해서 아예 없던 일이 되진 않으므로,

일단은 이렇게 쓰고 덮고 마무리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몇 차례 치고받는 싸움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데,

나는 꽤 오랫동안 이를 맹신하며 살아왔다.

나는 엄마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라는 믿음이다.

생김새는 말할 것도 없고(동생이 어머니를 꼭 닮았다.),

성격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지점에서 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확신하고,

또 확신하고, 확신에 확신을 덧붙여 가면 살아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뭘 만들고 뜯어고치고, 세세하게 끼워 넣고, 같은 동작을 특히 어려워하는데

(그래서 우유 팩 뜯을 때마다 고생한다. 한쪽을 차분하게 밀고 살짝 벌려 접으면 되는데

어머니는 이 동작이 매우 서툴다. 그래서 집에 있는 우유란 우유는 양쪽이 다 뜯겨 나가 있다.

우리 자매는 어릴 때부터 이를 겪어왔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조심히 우유를 따라 마신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어느 정도는 한다.

어머니는 지금도 '사람 믿지 마라'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믿음이 있다.

물론 인간에 대한 환멸로 부들부들 댈 때도 더러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않은' '아주 적은 수'의 사람에게 계산 없이 마음을 쓴다. 드라마 대사처럼 '전적으로 믿는'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걸 극히 꺼렸으나

나는 (물론 매우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나) 이를 많이 극복하여 일 년에 두세 번 즈음 강의를 한다.

칠팔십 명 청중 앞에 서서, 두세 시간을 내리 이야기하는데 죽을 만큼 어렵다 거나,

도망치고 싶다 거나, 그렇진 않다.

어머니는 운동이라 하면 아주 질색팔색인데, 나는 운동을 해야 산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운동 쉬어야지, 하면 그 순간부터 몸이 더 지친다.

어머니는 MBTI로 치면 T에 가깝다.

그래서 언제 한 번은 '바퀴벌레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만약에 엄마 딸이 밤 사이 아주 큰 벌레로 몸이 바뀌어 버린 거야. 그럼 엄마는 어떻게 할 거야?)

어머니는 "왜? 왜 변해야 하는데?"에서 더 나아가질 못해 중도 포기했다.

아니, '왜'가 아니라, 어떻게 할 거냐고. 같이 살 거야? 아님, 어떻게 해버릴(?) 거야?

그에 반해 나는 F다. 사실 지금 다시 하면 T 쪽으로 많이 움직였을 것 같긴 한데 그럼에도 F가 맞다.

어머니와 나는 이렇게 다르다. 아주 상극이라 할 수 있다.

더 찾아 쓰라하면 아마 한두 쪽은 더 쓸 수도 있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믿음으로 삼십 년 넘게 살았는데,

요즘에는 그게 전부는 아니란 생각을 한다.

순간순간 '잉?' 하게 되는 지점이 자꾸 나온다.

나와 꼭 닮은 어머니. 아니. 어머니를 꼭 닮은 나.


두툼하고 약간 직사각형(?) 꼴을 하고 있는 손발과 굵은 발목.

(다행히 손목은 보통 굵기이다.)

발목이 가는 동생은 발목이 어디 있냐, 라며 양손을 모아 굵기를 가늠하는 시늉을 한다.

무슨 참외라도 감싸 쥔 양 있는 힘껏, 아주 크게 가늠을 하는데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아무튼, 몸 모양은 그럴 수 있다. 딸이 엄마 닮지, 그럴 수 있어.


문제는 '나에게는 결코 없다'라고 자부했던 어머니의 성격과 성질 머리(?)를

나도 꽤나 많이 닮은 데에 있다.

몇 백 평은 되는 연금매장에 덩그러니 앉아 보증금 안 주면 나도 안 나가,를 시전 했던 어머니.

사실 그에 비해 나는 전재산을 건다던가, 받아야 할 돈을 못 받아 어디 주저앉고,

드러눕고 멱살잡이 한다던가, 아님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을 이유로 큰 불이익을 받았다던가,

하는…. 그렇게 극단적인 경험은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아주 없는 건 또 아니다.

크고 작은, 아니 작고 작은 사건사고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릴 때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그냥 조용히 씩씩대다 말고, 어디 들어가서 울고 나와서는

또 아무렇지 않게 사는 척하고, 며칠 몇 주 깊은 우울 모드에 잠겨 다 죽어가는 얼굴로 출퇴근하는 식의,

썩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 안곤했다.

아는 방법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한 살, 두 살 나이 먹어가다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님을,

이렇게 살다가는 속이 다 썩어 문드러져 '제 명에 못 살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백발의 몸짱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인 사람인데, 그럼 곤란하지.


마음이 헐거워지니 그간 참고참고 또 참아왔던 감정이 조금씩 바깥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히 걸어 잠갔는데, 그 안에 들어 찬 감정의 부피가 점점 늘어나다 보니 그 아무리 큰 자물쇠라 할지라도 이를 다 감당할 순 없었다.

그래서 서른 살을 기점으로 조금씩, 조금씩, '파이팅'을 하고 있다.

'화'이팅 말고 '파'이팅. 싸운단 말입니다.


헛소리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출근하자마자마 참지 않음 모드를 켠다.

공기 중에 들려오는 아주 미세한 헛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특히, 권한을 가진 여러 어른의 상식 밖의 말과 생각, 선택에 대해 아주 작은 헛소리라도 듣게 되는 때면

나는 맞바로 두드러기 같은 막말이 막 쏟아져 나온다.

(공기 반, 소리 반) 뭔 소리하는 거야, 진짜.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반쯤 웃는 얼굴로, 마주 앉은 동료에게) 정말 어질어질하네요.

(한참을 자리에 서서, 반쯤 썩은 얼굴을 하고서는) 이게 지금 맞는 말이에요?

(자리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하, 참. 사람이 곱게 늙어야지.

조용히, 나직이, 하지만 육성으로 내뱉고야 만다.

이와 같은 방법은 물론 매우 비공식적인 차원의 노력이며, 편한 사람과의 주고받음이다.

(최근에는 이 놈에 비아냥대는 말투가 입에 붙어 아주 난감하다.

오죽하면 새해 목표 중 하나가 '비아냥대지 않기' '(무작정) 비꼼 금지'일까.

내년부터니까, 얼마 남지 않은 올해 동안에는 아주 쉼 없이 비아냥대야겠다.)


공식적인 자리에선 조금 순화한다. 당연히.

공손하고 예의 바른 말로, 당신의 헛소리에 나는 지금 이런 마음이 듭니다, 따위의 말을 에둘러 표현한다.

설문조사로 의견, 욕구/만족도를 조사할 때도 있는데 그때 나는 그 조사의 무기명 여부를

재차 확인한 후 적절한 수준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당신의 처지는 이해하나, 이렇게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하는 식.

출근하고 내리 여덟아홉 시간을 이렇게 씩씩 대다 퇴근한다.

퇴근하면 좀 괜찮아야 하는데, 집에 가는 길에 유튜브라도 열어보면….

살다 살다 2024년, 고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게 또 무슨 일? 몸에 분이 가라앉을 시간이 없다.

그렇게 씩씩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 왜 이렇지? 안 그랬는데, 분명.

작년 보다 올해, 올해보다 내년, 더 나은 사람이 되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가단 정말 큰일 나겠구나, 하며 자책하다가도

그게 뭐 어때? 그냥 우리 엄마 닮은 건데, 그게 왜?! 하고 마는 요즘이다.

딸이 엄마 닮지, 그게 왜, 뭐.




서른 살이 넘어서야 나는 '우리 엄마가 나를 정말 많이 사랑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는 그 사랑이 눈에 보이도록 하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갈구했고, 그 모습을 내보이는 데에 그 어떤 계산도 하지 않는 사람인 반면,

어머니는 너무 단단하고 예민하고, 때론 너무하다 싶을 만큼 냉랭했고 현실적인 사람이다.

아버지는 다 큰 딸 먹일 음식을 한솥 해놓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솥 해놓는 동안 주변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해놓는다.

아버지가 국과 반찬을 양 껏 담아놓고서는 "큰딸, 이건 집에 가지고 가세요." 하는 사람이라 하면

어머니는 그 옆에 조용히 나물과 마른반찬을 조금씩 묶어 내어놓는 사람이다.

밑반찬이 있어야지, 골고루 먹어, 하는 말과 함께.


십여 년 전, 온 가족이 탄 차가 반대 차선에서 유턴하던 차에 들이 받힌 적이 있다.

음주운전 차량에 의한 이중충돌 사고였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잠시 블랙아웃,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반쯤 접힌 차 앞부분에선 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일단 차밖으로 나가야지 싶어 더듬더듬 차문을 열어젖히는데,

앞 좌석에 앉은 어머니 손이 더듬더듬, 바로 뒤에 앉은 나를 만져 살폈다.

너희 괜찮니,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일단 나가야 해,라는 말로 물음에 답을 했다.

(뒷자리에 있던 나와 동생은 타박상으로 며칠 입원 후에 퇴원했고 어머니는 갈비뼈에 금이 갔다.

아버지는 허리와 목을 크게 다쳐 큰 수술을 받아야 했고 몇 달이나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큰딸 책이 나오면 무조건 첫 완독자는 우리 어머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 완독자이자 최고 다독자.

한 번 읽고 조금 지나 또 읽고, 심심하면 중간 즈음부터 펼쳐 다시 읽고.

동생은 유튜브를 하는데, 아버지는 꼭 자기 이름 세 자를 내걸고 댓글을 단다.

누가 봐도 이 사람 아빠가 쓴 댓글인데, 오죽하면 어머니가 좀 그만하라,라고 한다.

어머니는 댓글 대신 조회수와 재생시간으로 조용히 동생을 돕는다.

하루 종일 동생이 만든 영상을 틀어 놓는데 가끔은 노트북 한 대와 휴대전화 한 대로

각각 다른 영상을 재생시켜 놓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동생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하나는 좀 끄라,라고 한다.)

자식 자랑, 남편 자랑하면 안 돼,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자랑하는 우리 어머니.

근무 중 쉬는 시간에 갑자기 큰딸 책을 펼쳐 읽다 발각되면 약간 머쓱하게

"이 책…? 우리 큰딸. 큰딸이 쓴 책인데, 아니, 뭐. 그냥 자기 일 하면서 쓴 책이야, 대단한 책은 아니고."

점심시간이면 이어폰을 끼고 동생 영상을 보고 듣곤 하는데 역시 발각되면 또

"이건 우리 작은 딸. 매주 뭘 올리더라고. 작은 딸은 음악해, 음악. 이번에는 또 어디 가서 뭘 한다던데."


어머니의 사랑은 늘 이렇다.

그 노고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랑, 티 내지 않는 사랑.

틈을 알아보는 사랑, 틈을 메우는 사랑,

은근하고 꾸준하게 뒤를 밀어주는 사랑.

한때 나는 아버지 식 사랑에 숨이 막혀하면서도 어머니에게서 이와 같은 직설적인 사랑,

가감 없는 사랑, 단순하고 명료하고, 거침없는 사랑을 받고 싶어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기에 사랑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과 마음은 아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안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사랑을, 그 사랑을 내어주기 위해

포기하고 희생하고 때론 가면을 써서 감추어야 했던 눈물을.



독립하여 산 게 벌써 삼 년이나 됐다.

대체로 잘 살고 있다.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게 너무 많고 자잘하여 벅찰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삶에 나름은 만족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사는 게 너무 막막하고 답답하고, 버겁고 무겁고, 당장 고꾸라질 것만 같을 때도 있다.


퇴근하고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멈칫한다.

여기에서 버스를 타면 아버지, 어머니 있는 집에 갈 수 있다. 환승 없이 한 번에.

아, 엄마 보고 싶다. 아빠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

지난 삼 년간 몇 번이나 고비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버스를 탄 적은 없다.

잘난 척은 잘난 게 없어 못하지만, 잘 사는 척은 할 수 있으니까,

나만 조용히 있으면 돼. 며칠 지나면 또 괜찮아지더라고.

괜히 여러 사람 걱정 시킬 필요 없지. 가자, 집에 가자.


그렇게 버스 정류장을 지나 십 여분을 걸어 지하철에 탄다.

지하철 타고 시도를 넘어 독립해서 사는 나의 작은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에 왔네, 하는 혼잣말과 함께.

그렇게 한주를 보내고서 주말에 아버지, 어머니를 보러 가면 꼭 티가 난다.

다른 사람은 절대 모를, 당신 딸의 내밀한 감정을 우리 어머니는 단박에 알아본다.

딸, 입술이 다 터졌네. 눈은 왜 이렇게 벌겋고. 힘들구나, 우리 딸?

나는 아니, 괜찮아, 하고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만 아닌 게 아니었고 괜찮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어머니는 양손을 들어 다 큰 딸 얼굴을 둥글게 쓰다듬곤 한다.

우리 딸, 누가 우리 딸을 힘들게 했어. 확, 그냥.

누가 까불면 콱 이단 옆차기를 해버려.

어머니의 이십 년도 더 된 레퍼토리이다. 미취학 시절, 태권도 다닐 때부터 했던 말이니까.

이단 옆차기 맞을 사람만 바뀌었을 뿐, 그 사람이 맞을 짓을 한 건 똑같다.

물론 지극히 우리 어머니 입장에서.


한때는 나의 전부였고 한 몸이었으며, 모든 것을 공유했던 사람.

나와 너무 다른 사람, 하지만 나와 많이 닮은 사람.

사랑하고 미워했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딸이 엄마 닮지, 뭐,라고 했던 그 말이 요즘은 꽤나 큰 위안이 된다.

엄마 닮고 싶으니까. 물론 엄마의 모든 걸 다 닮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닮고 싶은 게 많으니까.

나란 인간에게, 우리 엄마가 엄마라서, 우리 엄마의 유전자를 절반은 물려받은 몸이라서

그게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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