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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미워했고 사랑하는_나의 어머니(1)

by 최우림

일천구백육십이 년 생, 충청북도 어느 산골마을 출신.

어머니는 십 대 중후반 상경했고, 그때부터 오십여 년을 서울 사람처럼 살고 있다.

서울 사람이 맞지, 이 정도면.


어머니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삼십 년 넘게 함께 살았으나 나는 여전히 '어머니'라는 사람을 잘 알지 못하겠다.

숨기는 게 많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매우 예민하며, 그 와중에 의심이 또 엄청 많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이런 어머니의 성향을 두고 '간첩'이라 말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 아버지가 이와 같은 말을 자주 쓴다. 너희 엄마, 저럴 때면 정말 간첩 같아, 간첩.


그런 어머니 모습은 가끔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좀 넘어가도 좋을 일도 꼬치꼬치 캐물어 확인해야 하고, 따져 묻고,

지금은 나이가 육십이 넘어 좀 덜하지만 우리 어머니 젊을 때는 정말 '말해, 뭘 해'였다.

음식 먹을 때도 얼마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인지,

먹는 음식보다 골라내고 발라내고 먹다 뱉은 게 더 많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자 하면 괜히 심사가 뒤틀린다.

물컹하면 탈락(돼지고기 지방 부분, 다른 회는 다 괜찮은데 연어는 싫어한다. 식감 때문이다.),

향이 너무 짙다? 탈락(연어 말고 숭어, 방어도 싫어하네. 흙내 때문에 탈락이다.),

모양이 이상해도 탈락

(대표적인 예가 각종 내장 류, 어머니만의 기준이 있나 보다.),

아무튼, 그냥 다 탈락이다.

문제는 그 탈락 부위(?)를 잘 모아 나나 아버지 접시에 슬쩍 올려놓을 때가 종종 있는데

물론, 나와 아버지는 그런 부위를 잘 먹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게…. 참. 안 그랬으면 좋겠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나란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사람마다 입맛과 취향이 다 다른데, 다른 사람한텐 그렇게 나긋하고 상냥하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면서도 정작 가족에겐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아니, 왜?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마는 못난 딸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사람을 너무 잘 믿어.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거야.

첫 직장에서 얼마나 고생했니, 그땐 순수해서 더 힘들었을 거야, 같은 말.

이 말을 한데 모아 정리하면 주제는 같다.

'사람 믿지 마라.'

이 말에 나는 반만 듣고, 나머지 반은 듣는 척하다, 그냥 옆에 놓아두고 만다.

엄마, 미안. 근데 나는 그 말을 다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사회복지 하는 사람이다. 우리 하는 일의 시작은 관계에서부터인데,

관계는 서로 간의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 '믿음'이란 게 어떤 관계에선 조금 깊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관계에선 조금 얕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고.

그 가운데 삶의 크고 작은 변화와 기쁨을 그가 '직접' 이루어 가도록 돕는 일,

이게 우리 일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믿지 마라' 같은 말을 들을 때면,

딸로서는 충분히 이해하나 사회복지사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반만 듣는다,라고 썼다.


사실 우리 어머니의 지난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믿지 마라'하는 말이 절로 나오긴 한다.

어머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얼굴 본 기억조차 없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변 여러 친인척의 도움으로 살아야 했다.

그래도 밥을 굶진 않았다.

당시 얹혀살던 집이 충북 그 시골마을에서 고구마 농사를 꽤 크게 짓던 집이었기 때문인데

아주 넉넉하진 않았지만, 세끼 굶지 않고 먹을 순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어릴 때 고구마를 너무 봐서(이고 지고 나르고, 먹었기 때문에)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한동안 고구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집엔 늘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큰집이었고, 그래서 일가친척 간 왕래가 잦았으며,

무엇보다 그 집 최고 어른이 부모 없는 우리 어머니를 자식처럼 아껴주었다 한다.

그 어른은 식구 중 어느 한 사람도 어머니를 하대, 천대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했다.

그 덕에 어머니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바로 취직하여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된다.


그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어머니의 밥벌이 역사는 대충 이렇다.

먼저 과자 공장, 크래커 류를 만드는 곳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내용, 예를 들면 어떤 파트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얼마나 오래 일했으며 급여는 어는 정도였고, 같은 정보는 정확히 들은 게 없다.

다만 어머니는 믹스 커피와 함께, 그 공장에서 나온 A 모 크래커를 먹을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엄마가 젊을 때, 이 A 크래'카'(꼭 크래'카'라고 발음한다.) 만드는 데서 일했잖아.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매번 같다.

그때 간식으로 과자, 초콜릿 같은 게 나왔는데 가지고 나올 수 없었거든.

그 안에서만 먹어야 하는 거야.

공장 나갈 때 검사하고 그랬거든?

근데 우리가(어머니 친구) 그걸 잘 숨겨 갖고 나왔잖아.

과자, 초콜릿을 어떻게 숨겨 갖고 나왔으며, 그렇게 가지고 나온 과자, 초콜릿으로 한 게

그냥 '주변 사는 친구와 나누어 먹음' 정도였다는 무용담(?)을,

환갑이 넘은 어머니는 매번 두 눈을 반짝이며 늘어놓곤 한다.

듣고 있던 나는 수십 년 지난 일임에도 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아니, 어떻게 그랬어? 나는 못해.


또 다른 직장은 O 맥주 계열의 작은 사무실, 그곳에서 어머니는 경리, 회계 일을 했다.

사장의 신임을 받았으며 회사 돈을 쥐락펴락(?)하는 수준으로, 모든 돈 관리를 도맡았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고, 출산 직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어떻게 보면 태교를 숫자 계산, 돈 관리로 했던 셈인데, 이상하게 나는 숫자 다루는 데 영 취미가 없고,

일찌감치 수학, 과학은 포기, 돈 관리는 버는 게 없어 관리하고 말고 할 게 없다.

하여간 어머니는 그곳에서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했기에, 한 사건과 마주하게 된 어머니는 수습할 새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사장 아는 사람의 딸이라고 했나?

그는 모 여대에서 영어영문을 전공했고 졸업 후 우리 어머니 있는 사무실에 입사했다.

스물네 살의 무경력 신입이다.

그리고 그 신입 사원은 이미 십 년 가까운 경력을 가진, 그 회사 경리, 회계를 전담하고 있는

우리 어머니보다 높은 월급을 받게 된다.

월급 나갈 때 알았다 한다. 월급 지급도 우리 어머니 몫이었기 때문이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좌절감과 배신감, 이때의 사건은 더는 어머니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출산 즈음과 맞물려 있긴 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 만은 아니었을 테다.

그간의 노력과 노고를 일순 부정 당한 느낌,

형편 탓에 대학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그렇게 되고 싶어 된 게 아닌데,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아니, '악착같이' 참고 견뎠는데.

어머니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을 오랫동안 서성이며 더욱 이를 꾹 깨물었다.


아이를 낳고서는 연금 매장 한 칸을 얻어 화장품과 운동화 장사를 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그 작은 가게 안에 눌러앉아 있어야 한다.

유아차에는 당신 첫째 딸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다.

요즘은 일과 삶의 '분리' '균형'이란 말을 한다마는, 당시 나의 어머니는 이를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일과 삶은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동시다발로 일어났고, 마치 한 몸인 양 딱 붙어 있어

우리 어머니를 작은 가게에 한 편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월세 보증금을 몽땅 날릴 뻔한 적도 있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사람 믿지 마라'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 가게가 있던 그곳은 몇 백 평 되는 매장으로 각각 가게마다 벽을 세워 구분하는 대신

구역을 정해 장사하고 자리 사용에 대한 비용을 다달이 내는 형태였다.

나도 한때 그곳으로 매일같이 출퇴근당한(?) 입장이긴 한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지금으로 치면 백화점 1층 같은 형태라고 해야 하나?

큰 평수에 여러 매장이 나름의 구역을 나눠 물건을 파는 그런 모양?

아무튼, 당시 그 큰 매장을 소유하고 있던 악덕 사장은 모종의 이유로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있던,

크고 작은 가게를 모두 내쫓았고, 이때 보증금은 주지 않았다 한다.

순식간에 매장은 텅 비어갔다.

나중에는 정말 그 큰 매장에 남은 가게가 우리 어머니 자리 딱 하나였었는데

그 모습을 상상하면 나는 자꾸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 위 덩그러니 앉아있는 배 한 척이 생각난다.

작은 배 한 척, 아니, 구명 튜브.

어머니에게 그곳은 삶터이자 일터였고 '조금만 더 참자, 그리고 우리 나중엔…'하며

야트막한 꿈을 꾸던 곳이었다.

아니, 구명하기 위해 올라타야 했던 튜브였을지도 모른다.

'덩그러니 앉아있는'이 아니라, 어둠과 바람, 쉼 없이 몰아치는 거친 물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그런 삶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결국 우리 어머니는 월세 보증금을 되돌려 받았다 한다.

그 매장에 세 들어 있던 가게 중 유일하게 우리 어머니만이 해낸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벼락같은 성격(사장을 찾아가서 몇 번을 뒤집어 놓았다. 아마 멱살 잡이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하고도 남지, 우리 아빠.)과 우리 어머니의 돈을 안 줘? 그래? '그럼 못 나가 정신',

드러눕고 들러붙고 주저앉고, '방 못 빼 정신'이 합세하여 거둔 큰 결실(?)이라 생각한다.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삼십 대 후반과 초반이다.

지금도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젊을 때는 뭐, 할 말 다 했지.




삼 년의 시간이 지났다.

어머니는 둘째(동생)를 임신했고, 아버지와 함께 사진관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사진관은 꽤 벌이가 괜찮았다.

휴대폰이 어디 있나, 디지털카메라도 이때로부터 십 년 후에 나왔다.

초중고등학교 입학사진, 수능 원서 사진, 돌백일 사진과 가족사진, 결혼사진, 영정 사진 등등,

아무튼 사진관에 가야지만 됐던 때다. 사진관의 호황기.

아버지, 어머니는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했고, 차고 넘칠 만큼은 아니지만 가정 형편도 점차 나아졌다.

월세, 전세를 거쳐 드디어 자가를 마련했다. 그게 IMF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인근에 수십 개는 되던 다른 사진관은 다 망해 없어졌음에도,

반대로 우리 아버지, 어머니 가게는 돈을 벌어 집을 사고 가게 칸을 늘렸다.

가끔 아버지가 현금 다발을 집에 가지고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카드 결제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만원 짜리 지폐를 탁탁 놓아 네모나게 정리하고, 엄지검지만을 이용해서 착착착착 현금을 넘겨세던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릴 때 그 동작을 몇 번 따라 해본 적이 있었으나, 이게 그냥 되는 게 아니더라.

사실, 지금도 잘 못합니다. 셀 돈이 없기도 하고.



처음 몇 년간 바짝, 반짝 벌고, 다음 몇 년은 근근하게 유지했다.

덕분에, 나와 동생은 대학 공부를 큰 빚지지 않고 마칠 수 있었으며,

또 덕분에, 사회에 나와서도 빚 갚을 부담 없이 급여받는 대로 차곡차곡 저축하고 적금 붓고,

주택 청약을 넣고, 그 돈이 석사를 하고 집을 샀다.

물론, 그 '근근하게'라는 게 아주 '평온했다'를 의미하진 않는다.

특히, 아버지, 어머니는 같은 공간에서 노동하고, 같은 공간에서 삶을 살아냈기 때문에,

쉽게 말해 이십사 시간 중 이십 시간 이상을 꼭 붙어 있었기 때문에 너무 많은 말과 감정을 주고받았으며

그 끝은 결국 여러 형태의 싸움으로 귀결됐다.

정말 많이 싸웠다. 노동하는 곳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곳에서도 두 사람은 징글징글하게 싸움을 이어왔다.

시작은 미미해도, 끝은 창대했던 싸움.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작은 아이였고

때문에 나는 '결혼'과 부부에 대한 환상이랄 게 없다.

저렇게 싸울 바엔 차라리 따로 사는 게 낫다 싶을 만큼, 그래서 때로는 두 사람의 헤어짐을 기도했을 만큼.


싸움이 나면 나는 무조건 어머니 편에 섰다.

몸도 작고 힘도 약한 사람 편에 서는 게 맞다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 성질을 알기 때문에, 정말 큰일 날 수도 있다,라는 두려움에 더더욱

몸으로서 그 큰일을 막아내려 한 것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 딸은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어느 한 사람 편에 서는 걸 포기했다.

둘 다 똑같아, 두 사람 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제발 끝내.


우리 아버지는 성질이 벼락같은 반면, 다시 말해 한번 우와악, 하고 나선 그다음엔 정신을 차리는 반면,

우리 어머니는 한번 폭발하면 두세 시간을 쉼 없이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잠잠해질 무렵부턴 어머니의 따발총 같은 분노가 발사되는데,

이는 다시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고 다시 우와악, 하고 부딪히고….

아주 환장하는 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나는 싸움의 방식(?),

분노를 감당하는 방법을 배우자 선택 기준 중 하나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라는 교훈인데 너무 신중하다 보니 아직 배우자가 없다.


아무튼, 그 '근근하게'의 기간 동안 두 사람의 몸과 마음, 정신은

조금씩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와선 알 것 같다.

이십 년 가까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해온 그 싸움에 대해.

두 사람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 이십 년간 두 사람은 정말 별별 인간을 다 만나봤을 테다.

막무가내 밀어붙임과 막말, 돈을 주니, 마니, 실랑이,

어떤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자기 증명사진이 담긴 봉투를 쏙 빼서

도망가기도 했다. 당연히 돈은 안 냈다.

현장에 나도 있었는데 정말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또 한바탕 싸움을 했다. 왜 한눈을 파냐, 왜 자리를 비웠냐, 등등.

보통 이상의 성질머리를 한 두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이 상식 밖의 인간과 상식 밖의 진상 짓거리를

참아왔던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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