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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Sep 29. 2022

9월 29일 전다연의 하루

이별 후 첫 만남

수업이 끝난 후 집에 가려는데 은영이가 밥을 먹자고 했다. 오늘은 그냥 피곤해서 바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학교 근처에 괜찮은 파스타집이 생겼다는 은영이의 말에 결국 밥을 먹기로 했다. 은영이가 안내한 파스타집에 들어가니 우리 학교 근처에서는 보기 드문 인테리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학교 근처에 있기엔 조금 비싸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메뉴를 보니 가격은 또 합리적이었다. 은영이의 말에 따르면 맛도 가격에 비해 매우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은영이는 남자 친구와 한 번 며칠 전 이곳을 왔다가 파스타를 좋아하는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은영이는 나에게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내 기분도 풀어줄 겸 이곳에 나를 데려온 것이었다. 은영이는 참 내게 고마운 친구다.

은영이와 신나게 떠드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사진을 먼저 찍고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은영이의 말대로 가격에 비해 굉장히 훌륭했다. 나는 기뻐하며 은영이에게 빨리 먹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매우 좋았다. 

우리 자리는 문 근처였기 때문에 가게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맛있게 파스타를 먹으려고 하는데 나는 우연히 가게로 들어오는 어떤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곁눈질로 그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은영이는 내 행동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은영이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은영이가 나에게 미안할 것은 없었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이곳에 온 거였고 이곳이 인기 있는 곳이라 그도 밥을 먹으러 왔을 뿐이었다. 잘못된 건 우리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식당에 왔다는 것뿐이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파스타를 빠르게 삼키는 나를 본 은영이는 나보고 고개를 들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은영이의 말에 조금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었다. 


“야, 저쪽에 있는데 굳이 거기 보려고는 하지 마. 내가 보고 있어. 내가 보고 있어. 아이고, 걔랑 오셨네.”


은영이는 그가 있는 곳을 슬쩍 쳐다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는 내 위치에서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보려면 굉장히 어색하게 돌아봐야 했다. 


“걔랑 여기를 왔다고? 앗….”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큰 목소리를 낼 뻔했다. 


“잘잘못을 떠나서 쟤랑 저 녀석도 우리 학교 학생이니 학교 앞에서 밥 먹는 게 이상할 건 없지. 너무 의식하지 말고 이상하게 행동하지 마. 어차피 마주칠 수 있는 일이었어. 어…어? 에유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요.”


은영이는 몸은 내 쪽으로 하면서도 시선을 계속 그가 있는 쪽으로 고정하면서 말했다.



“뭐? 뭐를? 뭔데? 어우… 진짜…. 미친….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걸 꺼야.”


은영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지. 쟤도 너 엄청 의식하고 있어. 에유, 그냥 아주 모텔을 바로 가시지. 왜 학교 앞에서 저러고 있어. 근데 저 여자애... 걔 맞지?”


“어 맞아. 그때 걔야. 에이 짜증 난다.”


“다연아. 우리 술이나 먹으러 갈까?”


“그래, 차라리 그러자. 밥 맛있는데 남겨서 미안해. 일어나자.”


“아니, 내가 당당하게 하라고 했잖아. 밥은 다 먹고 가자. 이럴수록 릴랙스하고 당당하게… 알지?”


“그래, 고마워. 은영아.”



우리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먹고 있었는데 그를 보니 기분이 확 나빠지면서 음식도 잘 안 넘어갔다. 그래도 사준 은영이의 성의를 생각해서 겨우 겨우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은영이가 계산하는 동안 나도 계산대 옆에 서있었다. 멀리서 시선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쪽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가게를 나온 나는 은영이와 함께 근처 호프집으로 갔다. 술을 잘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술을 마셔도 될 것 같았다. 호프집에 도착한 우리는 500짜리 맥주를 하나씩 시키고 가장 싼 안주와 또 다른 안주거리인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저기, 죄송한데…. 번호 좀 알려주시겠어요?”


그가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은 3월의 어느 날이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내게 번호를 물어보는 그를 보고 나는 처음에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무시하고 가려는데 그가 다시 한번 나에게 정중하게 번호를 요청했고 옆에 있던 은영이가 “그냥 받아줘~”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에게 내 번호를 넘겼다. 

그 이후 그는 나에게 만남을 요청했고 마지못해 나는 그와 밥을 먹었다. 막상 같이 이야기해보니 서로 통하는 게 많았고 그가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3번 정도 만나고 나서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그는 나보다 3살이 많은 오빠였다. 사랑에 조금 어색한 나와는 다르게 그는 능숙하게 나를 다루려고 했다. 나도 완전히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서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때로는 과하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맞춰주려고 했다. 우리의 사랑의 균형은 처음에는 그가 더 내게 적극적으로 나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정말 사랑하려고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내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사랑을 한 시간이 굉장히 적어서 큰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나도 이별의 때가 오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별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7월 첫 주가 지난 시점부터 그는 일주일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학기 중이었으면 그가 공부하는 곳으로 가서 그를 만날 수 있었겠지만 방학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진심으로 걱정되었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이런 식으로 이별을 표현하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냉정한 톤으로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에게서 답은 없었다.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7월 중순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그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 위치는 조금도 상상하기 싫은 곳이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빨간색 머리를 한 여자와 함께 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모텔이었다. 

내 얼굴을 보자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빨간 머리는 ‘쟤 뭐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이었다. 바람일 것이라 확신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나는 며칠 전, 그에게 이별을 고했고 실연의 아픔을 겪던 그는 빨간 머리 여자애를 만나 다시 사랑을 시작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무시했다. 

최대한 좋게 해석하려고 했지만 후일담으로 들린 그의 이야기는 내 마지막 기대마저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는 나와 만나기 전부터 빨간 머리 애를 만나고 있었다. 빨간 머리 애도 우리 학교 사람, 나도 학교 사람, 그도 학교 사람. 그는 대담하게도 같은 학교에서 양다리를 거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만난 시점에 빨간 머리 여자애와 헤어졌을 때라고는 한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개강을 하면 그가 수업을 듣는 곳으로 가서 그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싶었다. 은영이는 내 계획에 동의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현실로 옮기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울음으로 그에 대한 증오심을 식힐 수밖에 없었다. 



.

.

.


“진부한 표현이지만 똥차였어. 친구가 그러던데 쟤 학과에서도 소문 다 났다고 하더라.”


은영이가 앞에 놓인 땅콩을 뜯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무슨 낯짝으로 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거야….”


“부끄러움을 알면 저러고 있겠어?”


“에휴…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제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놈이야. 가서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거니까 우리 다른 이야기나 하자. 자, 짠~~!”


나는 맥주잔을 들고 은영에게 건배를 하자고 했다. 은영이는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나와 잔을 부딪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와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은 않은 쓰레기를 모두 만난 날이 되었다. 이별 후 처음으로 그를 만난 날이었지만 이젠 증오심도 짜증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말한 것처럼 그가 어디 가서 다치든 죽든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다시는 그를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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