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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Sep 28. 2022

9월 28일 손민규의 하루

어릴 적 상장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칭찬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단순히 어른들에게 이쁨을 받는 정도가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잘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은 것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그림을 잘 그려서, 피아노도 잘 쳐서, 운동을 잘해서 등 내가 칭찬받을 요소는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내 방에는 상장들도 가득했다. 평소 행실로도 많은 상을 받았고 어디 대회를 나가서도 상을 받았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하셨고 친척 어른들은 ‘민규가 커서 큰 어른이 되려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학교에서도 칭찬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나는 어딜 가든 모범생에 기대를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등학교에 간 이후 나는 특별한 줄 알았던 내 재능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정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칭찬만 받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결과까지 보여준다는 것을…. 학교나 다른 곳에서 주는 상장이 그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사실 예체능 분야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일반 공부였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항상 전교 1등을 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성적이 뚝 떨어졌다. 내가 진학한 학교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 실력은 그들에 비해 형편없었다. 나는 슬럼프에 빠져 알던 것도 모르게 되었고 결국 성적은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부모님은 나를 크게 혼내셨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부모님은 내게 눈물까지 보이시면서 나보고 정신 차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할 때 내 성적은 학교에서 딱 중간가 되었다. 

대학교는 인서울을 하기는 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는 크게 어긋나는 곳이었다. 나는 어떤 학교여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등록금도 내주지 않으시고 재수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에 화를 내고 집을 나왔다. 어떻게 학교를 다닐지, 등록금과 월세를 어떻게 감당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지만 나는 설마 굶어 죽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대 초반, 나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미친 듯이 알바를 했다. 당시에는 하루에 3시간 정도를 잤던 것 같다.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모자란 잠을 채웠다. 나는 알바를 하면서 중학생 이후 처음으로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알바를 해도 곧잘 하는 나였기 때문이었다. 알바를 하면서 친해진 어떤 사장님은 나중에 업종을 변경하고 나서도 나에게 연락해서 같이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다. 어떤 사장님은 나에게 보너스를 주시기도 했었다. 나는 그들에게 성실한 일꾼이었다. 

군대에 가서도 나는 소위 말하는 에이스였다. 말도 빠릿빠릿하게 알아듣고 일도 열심히 하고 축구와 족구까지 잘하는 나를 싫어할 선임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성격이 개차반이라 나를 갈구는 선임도 있었지만 그런 것 빼고는 굉장히 순탄한 군생활을 했다. 간부들도 나를 좋아했는데 전역을 할 때쯤에는 부대에서 표창까지 받았다.

전역을 한 이후에는 예전만큼 알바를 하지는 않았다. 졸업을 제때 하고 취업을 바로 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나는 4학년 2학기 때 취업에 성공했다. 아버지는 또 나에게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을 들어갈 것을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당장 나를 취업시켜주고 월급을 줄 수 있는 회사가 필요했다. 다행히 내가 붙은 회사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이었다. 

회사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나는 일을 곧잘 했지만 사회는 단순히 잘하는 것만으로 인정받는 곳은 아니었다. 일을 잘 못 하더라도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만으로도 승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을 못 하면서도 내 위에서 나를 혼내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칭찬에 조금 인색한 조직이었다. 그래도 적응하는 데는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한지도 10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지나가는 인연인 줄 알았던 사람한테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우리들은 아주 평범한 곳에서 특별한 우리의 인연을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 들러 짐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드셨다. 여전히 아버지는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못마땅한지 나에게 잔소리를 하셨지만 나이 든 아버지의 호통은 내게 그저 슬픔으로만 다가왔다. 조용히 내 손을 잡고 잘 살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에는 눈물이 나왔다. 20살 때, 부모님과 더 함께 살고 설득하지 않고 나와 내 멋대로 산 지난날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방 안에 들어가니 부모님이 예쁘게 정리해주신 상장들이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것도 상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민망한 것도 있었고 지금 봐도 자랑스러운 상장도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혔던 상장도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적 받은 상장을 아직도 관리하고 곳곳에 전시를 해두고 계신 것이었다. 부모님에게 어린 시절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렇게 많은 상장을 받은 나를 보면서 부모님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라고 계셨을까?

오늘은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휴가를 냈기 때문이었다. 휴가 기간 동안 집 정리도 좀 하고 결혼을 위해 여자 친구와 이곳저곳 둘러볼 것이 있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얼마나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조금 퉁명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셨고 어머니는 나보고 고생했다며 계속 손을 잡아주고 계셨다. 나는 부모님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칭찬받고 상장을 많이 받던 아들이 부모님이 기대한 것처럼 크지는 못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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