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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Dec 02. 2022

12월 2일 송준우의 하루

되고 싶었던 것

평소와 다름없는 또 한 번의 하루가 끝났다. 직장 생활을 한지도 약 20년. 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보다 아주 약간 늦게 퇴근해서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작게 보면 미세하게 변화가 있는 하루였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항상 같은 이야기였다. 

어느새 내 나이도 48세가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의 약 30년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간 건지도 모르겠다. 항상 설렘이 가득하던 순간은 어느새 완전히 잊혀졌고 이제 항상 같은 풍경의 지루한 순간만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감상에 잠기는 하루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문득 그랬다.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해서 집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아내에게 전화해서 오늘은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운 날이었다. 차를 타고 한강 공원 근처로 갔다. 추운 날씨였지만 한강이나 바라보면서 생각을 하기로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강바람은 더욱 차가웠다. 하지만 걸어보기로 했다. 

한강을 바라보며 나는 옛 생각에 잠겼다. 주제는 내가 어릴 적 되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 내 모습이 후회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고 싶은 날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수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잘해서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과학자가 되어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었고 군인이 되어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를 지키고 싶었다. 그 시절의 모든 꿈들은 주로 위인전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이 걸어온 삶을 나도 살고 싶었다. 

중학생 때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 시절 나는 별다른 꿈이 없었다. 그냥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고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저항할 수 없는 내가 미웠다. 나는 그저 말을 잘 듣는 아이로 위장해서 부모님이 원하는 길을 걸어갔다. 중학교 때는 전교에서 1~2등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의 꿈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자 내 성적은 떨어졌다. 고1 때 몸이 심하게 아픈 적이 있는데 몸을 회복하고 나서는 공부를 하는 것이 더욱 싫어졌다. 집중력도 떨어졌고 책의 내용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성적이 떨어지자 부모님은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 나는 늦게 온 사춘기 탓인지 그런 부모님에게 화를 내고 집을 나가기도 했으며 질이 안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고2 때까지 나는 공부보다는 노는 것에 집중했다. 자식이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꿈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고3 때, 우연히 TV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외국에서 만든 다큐였는데 너무나 멋진 영상과 좋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게 되었다. 방송국 PD가 되자. 그래서 저런 멋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방송국 PD가 되기 위한 길을 걷게 되었다. 

뒤늦게 공부를 해서 부모님 기준에서 내 성적은 시원치 않았지만 나는 내가 한 것이 비해 좋은 점수를 받았다. 진작에 문과 계열 공부를 하고 있던 덕분에 나는 내 기준에서는 만족할만한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학과는 방송국 PD와 관련 없는 곳이었지만 PD를 뽑는데 전공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교 방송국에 들어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PD로서의 커리어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곳에서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하루는 선배가 나보고 방송국 아나운서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목소리는 꽤나 괜찮았기에 나온 제안이었다. 오디오 위주의 아나운서였지만 제안을 승낙하고 일을 해봤다. 그리고 그 일은 나에게 무척이나 맞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방송국 아나운서를 하는 것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오디오를 넘어서 영상에도 출연하였고 점차 내 모습을 가꿨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나는 본격적으로 방송국에 문을 두드렸다. 방송국 PD가 되는 길도 어려웠겠지만 아나운서의 길은 무척이나 힘든 여정이었다. 우연히 서류와 필기를 합격해서 면접이나 카메라 테스트를 보러 가면 나보다 훨씬 잘 생기고 멋지게 말을 하는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그들 앞에서 나는 늘 주눅 들었다. 원래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는 번번이 말을 버벅거렸고 면접관들은 나를 좋지 않게 봤다. 그러서 나는 항상 같은 과정에서 떨어졌다. 오기가 생겨서 다른 곳에 지원하면 이번엔 서류 단계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2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나는 점차 지켜갔다. 묵묵히 뒤에서 나를 응원해주던 부모님도 표현은 안 했지만 내가 슬슬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내가 눈을 돌리지 않고 방송국 PD로 지원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나는 결국 방송국에 가지 못 하는 운명이었을까? 인생을 같은 환경에서 두 번 살아보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 없는 답이었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일반 회사로 들어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수많은 탈락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거절을 당한 이후에야 지금의 회사를 만났고 그 후로 20년 간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살고 있었다. 이게 나 송준우의 인생이었다.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추워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청승맞은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 나는 주차장으로 다시 갔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좋아하는 피자를 샀다. 부모님의 어리석은 미련 때문에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올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중학생이 된 아들은 아마 어린 시절의 나처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불평 없이 묵묵히 공부만 하는 아들이 고마웠지만 그런 그가 걱정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소파에 누워 잠에 들어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피자를 거실에 두었다. 아직 아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걸 본 아들의 표정은 어떨까? 알 수가 없었다. 

아내가 보던 TV에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자연 다큐멘터리. 내가 어릴 적 만들고 싶던 것이었다.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면 지금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내가 만들 수 있었을까? 나는 한참 동안 서서 다큐멘터리를 봤다. 괜히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들이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아들에게 피자를 사뒀으니 하나 먹으라고 했다. 아들은 나를 보더니 가볍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먹지 않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굳이 아들을 또 부르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먹고 싶으면 나오겠지. 모든 선택은 아들의 몫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게 필요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내 옆에 앉아 아까 보던 TV를 계속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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