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쿠리 안 하꼬방

보광月동

by spacehost

작성자_제이드


라떼 이태원 라운지 클럽에서 바텐더를 했었다.

때마침 한남동 와인샵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친한 언니가 있어서 오후에 한남동 와인샵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면 이태원으로 출근하기 위해 20-30분 천천히 한남동과 보광동 사이를 걸어 다녔다. 그렇게 이 동네를 알기 시작했고 최근 한남 재개발이 추진된다는 지역을 찾아가 사라지기 전 추억과 마지막 기억을 새기기위해 어반구스 크루들과 함께 동네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보광동은 용산구에 속한 마을로 뒤에는 남산이 있고 앞에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보광국사(普光國師)가 세운 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지역에 비해 민속신앙이 활발한 곳으로, 점(占)집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광동 - 실핏줄 같은 길이 이어진 골목 (골목이야기)

KakaoTalk_20201031_165347323_11.jpg 마중 나온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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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보광이에서 웃보광이로 오르는 길 / 집의 노후가 심각하다.도시화 이전 보광동은 건넌말, 웃보광이 그리고 아랫보광이로 나뉘어졌는데 보광동의 본마을은 오산고등학교와 삼성리버빌아파트가 있는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며, 용산기지와 국립중앙박물관주변 둔지미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이 웃보광이로 불리게되었다.


2020-11-04.png 출처: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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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지미 부군당

보광동 무후묘는 현 용산기지 일대에 있었던 "둔지미 마을"의 마을 제당이다. 둔지미 부군당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전략 변화로 1916년에 20사단 사령부와 조선군사령부가 용산기지에 들어오게 되면서 둔지미 마을은 현 용산구 보광동 일대로 강제 이전되었다. 이와 함께 마을 제당도 용산구 보광동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KakaoTalk_20201031_165237440_12.jpg 우사단로는 좌측 대사관로는 우측

1950년대 중반 후암동이나 해방촌 등 도심지에서 철거한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공동묘지 위에 천막촌을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점차 건축자재를 구해 집을 짓기 시작한다.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짓는 격이어서 사람 뼈가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도심지 철거민들은 공동묘지 위에 마을을 이루어 갔고 국가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우사단은 현재 작은 가게들이 형성된 "우산단로"로 불린다.


5.16 군사 혁명 당시 1201 육군 공병단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에 혁명 이후 정부 고급관료들의 호화주택이 생겨난다. 1969년 12월에 "도둑촌"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정신을 망각한'호화 주택의 보유자를 조사한다. 언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집주인들은 호화 주택을 처분하거나 임대하고 도둑촌을 떠났으며 그 후 각국 외교관저나 기업인들의 소유로 바뀌었다.

KakaoTalk_20201031_165237440_01.jpg 대사관이 즐비한 도둑촌
국회에서까지'도둑촌'이라 불린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일대 호화주택가에는 지난 2월부터 이사 붐이 일었다. 연초 박 대통령의 처분 지시에 따라 전. 현직 장관과 국회의원, 고급관리, 주요 기업체의 장등 33채의 저택주인들은 앞을 다투어 문패를 갈고 집을 처분하고 있는 것이다. '도둑촌'이란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야 싯가5,6천만원짜리 고급주택을 어떻게 지어 살 수 있겠느냐 라고 동네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이 주택가가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작년 8월.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C의원의 집에 문상객들이 들르면서부터였다. -조선일보 1970년5월21일자 조간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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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동이 주거지화로 시작된 것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전재민들인 하꼬방을 지어 정착하면서였고 1960년 도심지의 철거민들에게 시유지를 분양하면서 본격적으로 주거지로서의 역할과 다양한 상업시설이 본격적으로 형성된다.

하꼬방=상자 같은 작은 집 / 판잣집

당시 하꼬방으로 짓는다고 해서 형편없지는 않았다. 나름 구들장과 기와를 얹어 짓기도 했다. 목재상과 철물점이 호황을 이루었다. 더불어 과일과 채소 등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며 인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없을 정도로 시장에서 일상용품 거래가 활발하다.


보광동 지역에 관해 스터디를 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흥미로운 발견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한남동 하이페리온아파트는 이전에 사설빙고와 민간빙고업자가 겨울철에 얼음을 저장한 후 빈 곳은 톱밥으로 메꾸었다가 여름철에 빙고를 열어 얼음을 판매했다는 것. 그래서 서빙고, 동빙고란 지명이 생겨난 것이었다.

보광동 건너편인 반포지역은 참외와 수박밭이었으며 원주민들의 기억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여름이면 한강을 헤엄쳐서 서리하러 다니느라 여름이 가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또한 반포 사람들이 서울 시내로 가는 관문이었다고 한다.

우사단로의 주거지 형성으로 대부분이 일이 끝나고 팔고 남은 물건들을 동네에서 다시 팔았다고 하는데 저녁 무렵 물물교환이 활발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도깨비시장이다. 낮에는 조용하다가 밤이 되면 불이 켜지는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났다.


KakaoTalk_20201031_165237440_20.jpg 다정한 골목길

보광동 터전은 소쿠리모양 혹은 삼태기 모양을 지니고 있다. 소쿠리는 일정한 양이 차면 넘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광동에서는 집을 높게 짓지 않았다고 한다. 몇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도산에 이르게 되니, 소쿠리가 차고 넘치면 망한다는 보광동 사람들의 단골 이야기 소재로 등장해 왔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면 보광동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한남대교를 건너면서 멀리서 보이는 보광동은 사람 냄새가 나는 마을로 인식해왔다. 소쿠리 안 하꼬방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부자란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껴본다.


temp_1604482631323.-473472589.jpeg 어반구스 다음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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