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月동
작성자_제이드
봉천 어느 산부인과에서 1983년 나 태어나다.
여전히 나는 서울 태생이라지만 서울을 잘 모른다. 그래서인지 만 29살에 서울 이곳저곳 답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관심도 없었다.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지와 나의 존재의 이유만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다 엄마가 장롱을 정리하면서 배넷저고리를 꺼내며 내가 태어날 때 입었던 것이라며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내가 아닌 배넷저고리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나 역시도 신기했다. 저리 작았구나... 그러면서 순간 나의 커진 몸뚱이를 보면서 그동안 뭘 했나 부지런히 한 곳만 파지 여기저기 파대서 수습하기만 바빴던 것 같다.
내가 기억나는 시절은 아현동부터이다. 6살 때부터 기억이 문득문득 난다. 작은 단칸방에서 가족 4명이 함께 잠을 자고 이후 작은 개량 한옥에서의 삶. 기억이 나지 않은 어릴 적 사진을 보니 연립에서 기어 다니는 나의 사진을 발견하고 가족에게 물어보니 봉천에서 잘 살았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안돼서 아현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라고 했다. 엄마 표정과 말투가 심상치 않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이쁜이(나의 친구 겸 강아지)랑 산에 종종 놀러 갔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 등산을 한 것이 개구멍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인적이 드문 숲과 암벽을 등반했다는 것이다. 당시 처음 산을 마주한 것이라서 졸졸 아빠와 오빠를 쫓아 올라가기만 했는데, 아빠는 산을 이렇게 사람이 없는 길로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반구스 크루들과 서울대까지 가는 것을 코스로 잡아서 부지런히 걸어가던 중 개구멍 루트가 문득 생각이 났다. 사람은 참으로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것 같다.
아버지와의 등산은 늘 서울대학교 안에 있는 개구멍을 통해 산으로 들어가는 코스였는데, 산은 둘째치고 오빠에게 은근슬쩍 서울대가 이리 좋다는 무언의 기운을 주기 위해 갔던 것이었다. 결국 다른 대학교를 갔지만 대학은 서울대여야 한다는 압박과 부담을 느낀 오빠가 뒤늦게 안쓰럽다. 다른 이들도 대학 부담으로 자살을 한다는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학구열은 치열할 정도로 잔인한 것 같다.
고시촌을 들어서면서 코로나로 작은 고시텔에 갇혀 사는 학생들을 생각하니 답답했다. 답답한 공기를 카페에서 조차도 이제 맘껏 누릴 수 없으니 우리나라 주거정책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마음이 불편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올라 온 서울에 학생이든 회사든 경쟁사회에서 이겨내어야 하고 마음 편히 누울 곳은 갑갑한 성냥갑 같은 곳에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얼마나 외롭고 힘들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다투어 일어난 학생시위는 점점 역사 속으로만 기억이 되는 것일까. 전보다 심각해지는 빈부격차와 금수저, 흙수저의 삶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나 혼자 살기도 벅찬 사회 속에 주변 돌아보는 여유도 사라지는 시대인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나란 존재는 무엇인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고민하게 된다. 이제 파란 하늘 보기도 힘든 환경에 우리는 처해있다.
갇힌 사회라고 나의 마음의 문도 닫지는 말아야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것이 지금의 사회는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졌기에, 변화를 원한다면 분명 우리의 내일 날도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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