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마을.옥인동47번지_이정옥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판자로 집을 만들어 형성된 개미마을은 우백호를 담당하는 인왕산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인왕산은 호랑이가 주로 거주하는 곳이면서 인근 민가와 궁궐까지 출몰하였다고 한다. 기운을 받으러 간다. 호랑이 대신 고양이가 앵앵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공격성이라곤 사랑스러움에 심장을 콩닥콩닥 위협한다.
답사 날인 11월 일기예보에서 한파로 외부외출자제 권고 문자가 떠서 함께 답사하는 친구들과 일정을 변경해야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각자 무장한 채로 답사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한다. 폭염이 오든, 폭우가 오든, 한파가 오든, 우리가 가는 곳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한 마을일 뿐이기 때문에 별 개의치 않았다. 그곳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지붕이 있고 벽이 있고 문이 달려있는 집에 산다. 하지만 막상 마을에 가면 집은 형태만 갖추기만 급급한 실상 얼기설기 틈새 벽 구멍들로 간혹 집안까지 보인다.
면적 1만 5000평에 210 가구 420여 명이 살고 있으며, 6필지에 소유자는 367인으로 복잡한 권리관계와 인왕산에 위치해 제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아파트는 지을 수가 없다. 이로 인해 낮은 사업성과 암석들로 공사의 어려움까지 더해 결국 개미마을은 재개발 사업에서 벗어난다. 2021년 2년 전인 개미마을답사 때 낙후된 집들이 즐비하고 있어서 곧 사라질 마을 같아 사진을 굳이 찍을 필요 없다는 생각에 이번 답사에 큰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다. 친구들보다 일찍 도착해 천천히 마을을 돌아다녀야겠다란 생각으로 입구에 들어 선 순간, 한파 따위 치워주러 온 햇살이 마을을 환하게 비추어준다. 2년 전 못난이 개미마을은 반짝반짝 리모델링한 집들로 윤기가 흐른다. 집 주변으로는 파란하늘과 유연한 산들이 감싸 안고 있다.
해가 드리우는 마을버스 한 대가 오고 가는 큰길 주변으로는 노후된 집들이 새롭게 재단장하고 있었지만, 인왕산의 물길 위에 지어진 집들은 여전히 음지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 물길 건너편인 집 사이골목 계단은 깨져 있고 전선이 사람 어깨까지 내려앉아 있다. 대문 없는 빈집들로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간 곳은 치안과 사고에 노출된다.
홍제동 개미마을은 작은 동네이다. 1시간도 채 안되어 골목을 훑고 인왕산 건너인 옥인동 47번지로 장소를 이동한다. 서촌은 가끔씩 방문하는 동네이다. 체부동 4채 신축한옥에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참여를 했고 옥인동 47번지 내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지 이층한옥 한 채 실측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몇 차례 답사를 했던 이유는 집의 형태들이 흥미로워서이다.
다른 재개발지역과는 달리 옥인동은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판자촌이 아닌 조선시대부터 있던 동네이며 이곳은 윤덕영 가옥의 소유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윤덕영 가옥에 들어와 살면서 집주인 7명으로 늘어나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진다. 남산골에 윤덕영 가옥을 재현해 놓았는데, 왜 굳이 친일파 집을 누구 보라고 지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옥인동 가옥의 대문은 굳게 닫혀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어르신들이 마당에 물건을 쌓아놓는 장소로 대문이 가끔씩 열려있었다. 길게 뻗은 한옥에 마당 또한 넓었으며 기둥은 튼실했지만 비가 세는지 지붕에는 천막으로 둘러 쌓여 있어 미관상 버려진 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주인은 못났지만 집자체는 살려 놓으면 멋들어질 것 같은 상상을 한다. 마을의 탄생지는 다를지언정 개미마을과 옥인동 47번지의 공통점은 재개발로 장시간 묶이면서 사람들은 점차 동네를 떠나고 집들은 차가운 바람만 오가는 곳 이었지만 재개발이 해제되면서 서서히 다시 온기로 차오르는 마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시간 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 뭘 그토록 기다린 것일까.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도 용기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언제든 돌아갈 불 켜진 집을 바랄 뿐이다. 늘 그 자리에서 말이다. 인왕산 호랑이가 두 마을을 지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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