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앉자마자 뽀야가 나타난다.
말없이, 다소곳이 앉아 나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든다.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조급함도 없다. 식탁이 사람을 위한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자기 몫이 나오는 곳이라는 것도 뽀야는 안다. 그 믿음이 오늘도 뽀야를 그 자리에 앉게 했을 것이다.
간식을 주지 않으면, 뽀야는 앞발을 들어 조심스럽게 내 다리를 톡 건드린다. 말 대신 이렇게 전하는 것처럼. '나는 지금 이걸 원해.'
그 순수한 눈앞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다니.
집 안에는 뽀야가 좋아하는 간식이 여럿 있다.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 양을 조절한다. 저렇게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사실은 더 주고 싶다. 그래도 참는다. 대신 안아준다. 간식 대신 체온을 준다.
우리 집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존재는 뽀야다. 화내지도 않고, 삐지지도 않는다. 시무룩해질 때는 있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상상을 해 본다.
내가 '신'이고, 뽀야가 '나'라면.
신은 어쩌면 나에게 줄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아끼기 때문에, 다 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 갖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을 알고 조절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정말로, 너무도 간절히 원한다면 결국은 내 손에 쥐여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간절함은 뽀야의 눈빛이어야 할 것 같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 떼쓰는 마음이나 원망하는 시선이 아니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순수한 기대여야 하지 않을까.
뽀야의 간절함에는 불만이 없다. '왜 안 주느냐'가 아니라, '혹시 줄 수도 있지 않을까' — 그런 눈빛이다.
어쩌면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간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간절함의 얼굴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자주 조급해지고, 비교하고, 화를 섞는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간절함'이라 부른다.
뽀야는 오늘도 묻지 않는다. '언제 줄 거냐고, 왜 안 주냐고.' 그저 믿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아휴, 간식 하나 먹자."
해맑게 먹고 있는 뽀야를 본다. 신이 나를 본다면, 나는 어떤 얼굴로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