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연애 일기] 수정 같은 연애의 기억
‘오, 수정 ’이라는 흑백영화에는 종로 피맛골 고갈비 막걸릿집과 이은주란 배우가 나온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남자와 여자의 기억이 이렇게 서로 다르구나. 모두 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구나. 수정같이 빛나던 내 연애의 기억은 그래서, 참 다르게 남겨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래도, 서로 다른 기억의 부분들을 잘라내고 또 도려내서, 남게 되는 마지막 한 조각 기억만큼은 서로 같기를 간절히 바랬다. 기억하는 구체적인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져도, 기억하고 싶은 사랑의 본질적 장면만큼은 같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봄날, 춘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상봉터미널로 갔다. 춘천과 서울을 오가는 게 익숙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표를 끊고 버스에 올랐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 창밖에서 봄 햇살이 흘러들어왔다. 햇살이 그와 나를 간지럽혔다.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손위로 포개졌다. 그는 내 손에 깍지를 낀 채 손가락 사이사이로 지그시 힘을 뺐다 줬다 하면서 장난을 쳤다. 손을 잡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흘렀다. 그걸 보고 나도 따라 ‘피식’ 웃었다.
“난 봄이 좋아. 파릇파릇 4 월에 태어났거든 ”
“아, 그래? 그럼 오늘 밤 여행 온 기념으로 생일파티할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북소리가 들려왔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자연스레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듬을 타며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오늘 밤 생일파티에서 무얼 하고 놀까? 드디어 그 밤이, 올 것이 오고 있다는 짜릿한 불안감이 나를 감쌌다.
춘천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일을 빙자해 춘천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가 대학 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서인지 그도 들떠 있었다. 그가 나를 사람들 앞에 어떻게 소개할까 궁금했다. 내심 기대를 했다.
“서울에서 같이 일하는 선배야. 인사해.”
‘에게 ~이게 뭐람? 겨우 선배야?’
“여기, 같이 둘러보러 왔어요. 이상하게 보지 말아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선배와 이 봄에 왜 춘천에 같이 왔냐며 저만치서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그 사람들에게 “내 사랑하는 여자 친구야. 인사해.”라고 말할 순 없었을 터였다. 우리는 선후배 동료에서 연인으로 지내기로 한지 불과 일주일도 안 된 상태였다. 우리는 오후 내내 화창한 봄 한가운데 서서 그가 활동했던 곳곳을 찾아다녔다.
“여기는,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크게 다쳤던 역사의 현장이야.”
“많이 다쳤어?”
“다리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친구가 뭘 발라줬게?”
“빨간약?”
“아니, 그건 바로바로 무좀약!”
“하하하 , 왜 그랬어?!”
그가 놀던 동네 , 그의 추억을 따라가면서 시답지 않은 그의 얘기에도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종일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었더니 배가 고팠다. 수중에 돈이 없어 현금인출기가 있는 곳에 갔다. 맨 구석 기계 앞에 섰다. 그는 돈을 뽑았다. 머리를 돌려 휙휙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아주 크고 당당한 걸음으로 CCTV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나에게 짧고 강렬한 키스를 했다. 그의 엉뚱하고 느닷없는 행동이 낯설지만 싫지 않다. 그에게 점점 빠져 들고 있었다.
우리는 도심 보석상가로 나와 커플링 반지를 맞췄다. 커플이 되면 하고 싶었던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서로에게 가느다란 실반지를 끼워 주었다. 손가락이 긴 그는 반지가 꽤 잘 어울렸다. 그가 떡볶이 손 같다며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그와 내 손에서 변함없이 똑같은 링이 빛났다.
늦은 오후, 소양강변 카페에서 함께 바라보는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춘천에 사는 선배 부부를 불렀다. 강변에 서니 햇살에 나부끼는 따뜻한 바람이 우리를 감쌌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겨 두고 싶었다. 내 소원을 알아챈 듯 선배는 필름 카메라 사진기로 우리 둘을 찍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서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생일을 밝혀줄 초와 케이크, 와인이 준비됐다. 고깔모자를 쓰고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우리 둘은 폭죽을 터뜨리며 생일파티를 했다. 그와 단 둘이 맞는 내 서른 살 생일 파티. 그날 밤 그와 나는 달콤한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낭만의 이불을 함께 덮었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