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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May 03. 2024

내가 좋아하는 음료-윤혜와 밀크티

학교 후문으로 나가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가면 백반집들이 조르륵 모여있었다. 승준과 윤혜는 그중 대성집을 좋아했다. 불맛 나는 제육볶음이 일품이었지만 둘은 두툼하고 폭신한 계란말이를 더 좋아했다. 대성집에서 밥을 먹고 나서 코스처럼 들리던 곳은 대각선 건너편 홍차찻집이었다. 끌로이가든이라는 이름의 찻집은 좁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있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둘만의 아지트로 입장하는 기분이었지만 테이블이 몇 개 없는 끌로이가든은 언제 가도 만석이었다. 프로방스풍의 인테리어에 테이블마다 램프가 켜져 있어 누구든 그곳에서는 완벽한 웜톤이 되었다. 창백할 정도로 투명한 피부를 가진 윤혜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 속 자신이 좋았다. 승준은 늘 드립커피를 시켰다. 윤혜는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밀크티를 골라 시켰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승준과 함께 간 그날은 얼그레이밀크티를 시켰다. 어두컴컴한 생활관 2층 자판기에서 뽑아먹는 데자와가 밀크티의 전부였던 윤혜가 끌로이가든 밀크티를 처음 먹은 날, 식상하지만 천국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밀크티를 시키면 자잘한 꽃무늬를 수채화로 그린 듯한 둥근 찻주전자에 담겨 나온다. 세트인 찻잔에는 작고 앙증맞은 망이 걸려있다. 같이 나온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다 내려가길 기다리는 순간이 윤혜는 좋았다. 멍하니 모래를 바라보고 있으면 손끝에 부드러운 모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뭇잎들이 짙은 초록으로 변할 준비를 마친 어느 날, 윤혜는 유치원 아이가 장난치듯 모래시계를 몇 번이고 돌리며 내려오는 빛바랜 노란색 모래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찻잎이 오래도록 우려져 떫어질 대로 떫어진 아쌈밀크티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윤혜는 그날 이후 찻집을 향하는 좁고 높았던 계단을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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