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여유 Jun 14. 2024

수박은 먹고 싶고, 자르기는 싫다.

여름 과일 중 수박을 참 좋아한다. 더위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찬물로 세수를 해도 소용이 없는 날이 있다. 샤워하고 나도 한 번 먹은 더위는 뱉어지지 않는다. 그런 날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수박을 꺼낸다. 아삭 베어 물면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넘어가면서 쌓여있는 몸속 더위를 한 방에 몰아낸다. 가장 좋아하는 피서법이다. 찬 음료를 벌컥벌컥 마셔도 채워지지 않던 갈증이 단번에 차오른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도 소용없이 축 저진 기운이 회복된다. 나에겐 찬 수박 먹기가 최고다. 더위를 잘 못 참는 내게 여름나기에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데도 수박을 사려면 늘 망설여진다. 수박을 보면 시원한 청량감이 마음 가득 채워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수박껍질들이 날 가로막는다. 수박껍질 해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요령이 없어서인지 큰 수박 한 통을 자르고 나면 주방이 난리다. 어딘가는 계속 끈적거리고 음식쓰레기는 산더미다. 백화점 식품관에 가면 네모반듯하게 잘라준다고 한다. 인기가 많아 오픈런 해야한다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 돈이면 마트에서 한 통 더 사 먹겠다싶어서 가보지 못했다. 인터넷에는 수박 잘 써는 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가로로도 썰어보고 통에 맞춰 네모나게도 썰어봤다. 통에 예쁘게 잘 들어가긴 했지만 뒷처리는 매한가지라 그 방법이나 저 방법이나 내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살림 못 하고 게으른 사람인 게 여기서도 티가 나나 싶어 약간 좌절할 뿐이었다.




동생이 기가 막히게 맛있는 수박을 발견했다고 보내준다는데 거절하지 못했다. 문 앞에 있는 상자를 보자마자 반가웠다가 금방 또 근심이 생긴다. 이 한 통을 어떻게 하면 깔끔하고 편하게 해치울 수 있을까. 칼을 대자마자 쩍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수박. 달콤한 향내가 코끝에 와닿는다. 자, 이제 도구를 꺼낼 때다. 내 근심을 반의반으로 줄여주는 도구가 있다. 여러 방법으로 잘라봤지만 내게는 이게 딱이다. 먹을 때 한입에 넣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다 자르고 난 뒤 싱크대가 가장 깔끔하다. 그것은 바로 멜론 스푼이다. 동그랗게 수박을 파내고 담을 통에 툭 하고 떨어뜨리면 된다. 동그랗게 퍼내고 통에 탁 털고. 단순 반복을 조금 하고 나면 든든하다. 폭염주의보에도 맞설 수 있겠다 싶다. 남은 부분은 박박 긁어내어 주스로 만들어 마실 수도 있다. 헬멧 같은 모양으로 남은 수박껍질을 보면 오늘도 깔끔하게 잘 해낸 것 같아 뿌듯하다. 다 잘라진 수박껍질이나 총량은 같을 텐데 왠지 더 가볍게 느껴진다.

달콤하고 시원한 여름이 도착했다.

요즘 강점 찾기 코칭을 받고 있다. 코치님은 과정 중에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이제껏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많아서 답이 바로바로 나오지 않는다. 이번 회차에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삶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였다.

"저는 성장이라는 가치가 중요해요."

"여유님께 성장은 무엇인가요?"

"음... 나아지는 거요. 나아져서 스스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고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을 원해요."

마치 선문답처럼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 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나는 성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어제보다 오늘 더 만족스럽다면 성장했다고 여기는구나.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을 확인하고 많은 시도를 해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다. 시도 후에 나아지는 방법을 찾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나아지지 않는 방법 중 하나를 확인한 것이다. 성장이라는 단어를 보면 늘 설렜다. 그렇지만 한편 부담스러웠다. 성장은 거창하게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어야할 것 같아서였다. 새로운 자격증을 따거나 눈에 띄는 결과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지는 것은 왠지 난이도가 낮게 느껴진다. 할만하다고 생각되니 의욕이 생긴다. 목표를 잘게 부수라는 자기계발서의 말이 실감 난다.

매일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산다.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고 할 일을 한다. 점심 먹고 할 일을 또 하고 저녁을 먹는다. 하는 일 모두가 내 마음에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수박 썰기 같은 작고 단순한 일도 전보다 맞는 방법이 있다. 한 번의 시도로 나에게 꼭 맞는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이런저런 방법을 해보며 찾아가는 것이 삶 아닐까. 그 과정 중에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있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성장하는 삶인 것 같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고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무더위가 시작됐다. 세탁물을 찾아 집으로 오는 짧은 길에 혼잣말로 덥다 소리를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힘을 내자, 집에 가면 시원한 수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얼른 다 먹고 한 통 더 살까. 나에게는 아주 흡족한 도구가 있으니 이제 겁내지 말아야겠다. 지난여름보다 수박 자르기가 훨씬 수월하다. 한 계절을 다시 만나기 전에 성장했다. 나는 한창 나아지는 중이다.

시원한 여름 나세요!

*그동안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순간의 기록' 연재를 마감하려 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라이킷 눌러주시고, 댓글과 응원 남겨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지켜봐 주신 덕분에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 유의하시고, 새롭게 시작될 제 글도 기다려 주세요 ^^

이전 19화 아직도 줄이어폰 쓰는 사람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