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법 생생하게 생각나는 소소한 사건이 하나 있다. 내가 4-5살 때쯤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쯤의 기억은 많지 않다. 아파트 옆 마당에서 뒤좌석 앉는 곳이 폭신하게 되어 있던 세발자전거 타던 기억, 좋아하는 리본 달린 장화 신고 가서 신생아실에서 동생을 봤던 기억. 그리고 산타할아버지 전화번호에 관한 기억이다.
우리 집 옆집에는 외국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고 머리가 하얀 백발에 눈이 파란 서양할머니셨던 것 같다. 어느 겨울, 할머니가 아주 비밀스럽게 쪽지를 하나 건네주셨다. 그것은 산타할아버지의 전. 화. 번. 호! 산타할아버지에게 직접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고 하셨다. 이런 세계최고의 비밀을 내가 알게 되다니. 산타할아버지는 외국사람이던데 외국할머니니까 친구시구나. 다 외국할머니 덕이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숫자를 하나씩 꾹꾹 눌러 돌렸다.(돌리는 형식의 옛날 전화기) 영어로 누가 말을 하는데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럴 수가, 그건 생각을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야 하는데 그 나라 말을 할 수 없었던 꼬마는 슬퍼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그 나라 말을 배워 꼭 다시 전화해야지 하며 그 쪽지를 어딘가에 고이 간직했던 것 같다.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묘사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동영상이 아닌 몇 장면의 사진이다. 할머니가 주신 쪽지를 보고 전화를 했고 뭔가 우리나라 말이 아닌 말이 흘러나왔던 장면,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혀있던 쪽지. 연한 미색의 종이에 살짝 사선으로 적혀 있던 숫자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아마도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그 할머니가 영어를 하셨는지 한국말을 하셨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쪽지를 어떤 연유로 받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여하튼 기억은 희미하지만 한참 동안 산타할아버지와 통화할 수 있는 엄청난 비밀을 가진 아이가 되었던 것은 아주 생생하다. 마치 흑백사진 중에서 그 부분만 채색된 것 같은 효과를 부린 것처럼 말이다. 셔츠를 열면 안에 슈퍼맨 티셔츠가 나오는 것 같이 아주 비밀스럽고 내 몸속 어딘가에 슈퍼파워가 있는듯한 느낌에 든든하고 따뜻함이 충만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산타할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받았을 때 아이를 기쁘게 하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을 같이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기억이 되어 나를 채워주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채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사람을 꽉 차게 하는가.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당장에 그 마음을 쓰지 않아도 언젠가 필요할 때가 되면 기억 저편에서 채워졌던 마음들이 일어나 슬프고 힘든 나를 안아주고 지치지 않게 꽉 잡아줄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고,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어떤 기분을 느끼게 했는지는 절대 잊지 않는다
미국의 시인, 마야 엔젤루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어떤 기분을 남겼을까. 자주 보는 아이친구 엄마들에게는,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는 어땠을까. 언제부턴가 밖에서 사람을 만나고 들어오는 길에 했던 말과 행동을 되감기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 단어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을까부터 해서 하필 그 시점에 적합하지 않은 제스처를 한 것 같은데 오해했으면 어쩌지.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살피고 싶고, 카톡 메시지를 보듯이 상대방과 했던 대화를 주욱 복기해 보고 싶었다. 그것이 핵심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상대가 나와 대화할 때 어떤 것을 느꼈는지, 그것만 우려하고 신경 쓰자. 이 만남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상대가 느끼고 간직하게 될테니. 과하게 응답하지 않아도 손을 마주 잡고 안아주지 않아도, 진심으로 상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만남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기분은 전해질 것이다. 매일 마주치는 남편과 아이에게는 어떤 기분을 남겼을까를 생각하니 조금 많이 뜨끔해진다. 든든한 기분, 영원한 내편이 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는데 그간의 모습을 돌아본다. 불현듯 곰탕이 떠오른다. 속이라도 뜨시게 덥혀주면 그런 기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엊그제 동네 정육점을 지나오다 보니 곰탕 팔고 있더라, 오예! 파도 송송 올려줘야지.
*'오후의 글쓰기'(저자 이은경)에 나오는 글쓰기 과제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