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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Feb 23. 2024

만능재주꾼의 최후

재주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재주 1. 총명한 기운이 넘쳐 무엇을 잘하는 타고난
         소질이나 재능
       2. 무엇을 남달리 솜씨 있게 하는 기술
       3.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나 방도


재주가 많거나 뛰어난 사람을 재주꾼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내가 바로 재주꾼인듯하다. 재주가 뛰어난 쪽은 아니고 많은 쪽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리고는 또 잔뜩 읽지 않은 채 갖다 주는 재능이 있다. 빵집에서 혼자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빵을 고르는 재능이 있다. 손님이 오기 전 너저분한 물건들을 싹 모아 집안 어딘가로 감추는 재능이 있다. 관심사가 생기면 번개처럼 달려들어 일을 벌이고 각종 관련용품들을 사모은 채 흥미를 금세 식히는 재능이 있다. 이 재능들의 빈도수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작은 재능들이 아니나 굳이 '작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자 한다.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좀 부끄러워서 작고 작게 만들어서 없애버리고 싶다. 그것이 어렵다면 눈에 띄지 않게라도 해야겠다.

반면에 다른 재능들도 꽤 있다. 대화 중에 상대가 어, 그거 뭐더라, 있잖아, 하면 이거? 하며 척하고 단어를 찾아주는 소질이 있다. 어떤 식당에 가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아내는 소질도 있다. 좋은 것을 보면 선물하고픈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는 소질도 있다. 참 하찮게 볼 수 있는 작은 것들임을 알지만 이것들에는 '가장'이라는 부사와 '멋진'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주고 싶다. 소중함을 정식으로 부여해서 작지만 반짝반짝하게 만들고 싶다. 잃어버릴 일이 없도록 말이다. 어떤 SF영화에서 어떤 레이저총이 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아주 작게 만들거나 엄청 크게 만들거나. 그런 레이저총으로 없애고 싶은 재주는 아주 작게 만들고 멋진 재주는 크게 부풀리고 싶다. 하긴 그런 영화에서는 늘 그걸 반대로 만들어서 사건사고가 생기곤 했던 것 같으니 내 뜻대로 쉽게 이뤄지진 않을 것 같다. 없애고 싶은 재주가 대따만 해지고 얼마 안 되는 멋진 재주는 콩알만 해진다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최근 퍼스널브랜딩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매 수업에서는 정해진 질문에 답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장점과 단점, 내가 하고 싶은 일 등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모두 나에 관한 질문들이다. 취직준비하던 시절에 자기소개서를 쓰며 생각하고 쥐어짜 내본 것 이후로 한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이다. 그 앞에서 한참 동안 답을 하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백문백답을 써서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곤 했다. 보통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음식 이런 질문들이었던 것 같은데 백 개나 되는 질문에 그때는 어떻게 답을 했나 모르겠다. 서로를 알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을 알기 위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와 깨닫는다. 하긴 그 덕분인지 되짚어 보면 그 시절에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뚜렷했었다. 지금은 마치 무색무취의 사람이 된 것마냥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선뜻 알아채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에는 나, 너, 우리를 생각했다면 좀 더 크고 나이를 먹은 지금은 우리, 너, 나 순으로 생각하며 살게 된 것 같다. 당연히 뒤로 갈수록 우선순위는 뒤쳐지고 존재감은 옅어진다. 어른이 되어 독립을 하고 누군가의 혹은 스스로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살게 되면서 순위가 뒤 바뀌어 버린 걸까. 서점에 가보면 나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들이 가득한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볼펜 끝을 물고 한참을 고민해 봐도 답이 잘 써지지 않는 질문을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괴롭지 않았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답이 정해져 있고 그 답을 향해 한 줄씩 써 내려가던 풀이과정이 있는 수학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심지어 한 가지 답을 향해 가는 길도 수만 갈래의 길이 있다. 그런데도 재미있게 신나게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니. 뜨거운 탕에 들어가며 "아, 시원하다."라고 말하듯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 괴로운데 내심 즐겁다. 눈을 굴리고 입술을 깨물고 남편에게, 동생에게, 친구에게 괜한 질문을 하며 겨우겨우 답을 하나씩 해나간다. 내가 이런 걸 좋아했구나, 나 사실은 그런 일을 하고 싶었구나. 질문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하다. 브런치에 글 쓰는 것도 그렇다. 무엇에 대해 쓸까 고민하고 글감을  정한다. 생각을 가다듬어 글로 써보고 다시 곱씹는다. 생각과 의견을 글로 꺼내어 풀어놓는 일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두려웠는데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브런치에 약속한 연재를 한다. 하루종일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대고 그러면서 놓치는 일들도 꽤 많다. 자신들에 소홀해진 것 같은지 혹은 실제로 그런지 가족들의 귀여운 원성도 가끔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쳐내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실 이 상황을 즐기고 놓치고 싶지 않은 듯하다. 나를 알아가고 성장시키는 일이 낯설고 어렵지만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고 놀란다. 마음속에 난쟁이처럼 작아지고 앙상하게 말라있는 나에게 관심도 많이 주고 밥도 많이 줘야겠다. 마음속에 사니까 옆으로든 위로든 어느 쪽으로 폭풍성장을 하던지 상관없을 것 같다.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여태껏 발견 못 하던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돼라.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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